지하철 9호선 봉은사 역의 ‘봉은사’가 정말로 봉은寺였음을 알게 된 건 우습게도 얼마 전이었다. 서식지인 여의도에서 꽤 먼 거리이기도 했고 갈 일도 없어 관심이 없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사찰이 도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에게 받을 게 있어 봉은사 역 어귀에 위치한 그의 집 쪽으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한참은 남았기에 1번 출구로 나와 어슬렁 걸음으로 대로를 걸었다. 초 역세권이니 숲세권이니 말도 안 되는 좋은 조건의 집을 더 말이 안 되는 가격에 판다는 부동산 현수막을 지나니 역과 같은 이름의 사찰이 정말로 있었다.
올려다보면 눈이 시려오는 테헤란로와 삼성로 고층 빌딩들 옆 봉은사는 특히나 나지막했다. 하지만 소재로 쓰인 목재의 질감만큼 균형 잡힌 높이와 그 너비는 되려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힐링 스팟으로서의 사찰에는 종교와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단다.
나무로 만든 안내판이 보였다.
‘템플스테이: 한국의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사찰에서 1,700년 한국 불교의 역사와 수행자의 삶과 정신을 체험하는 문화 프로그램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다녀온 적 있었다. 누군가에게 말해준다면 대체 왜 한 거냐는 말이나 들어먹었음직한, 문제아가 아니었다면 반항아처럼 하고 온 템플스테이 체험이긴 했지만서도.
회사생활이 2년 차에 접어든 언저리였다. 똑딱대며 흘러가는 시곗바늘처럼 무료한 일상은 그렇다 치고 주말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거래처 연락에 신물이 나던 시절, 몸과 마음을 뉠 수 있는 어딘가에서 좀 쉬고 싶었다. 자연인들처럼 산속에 들어가는 건 너무 오버스럽고 해외여행은 휴가가 부족하고. 그러다 무릎을 탁 쳤다. 아~ 템플스테이!
언젠가의 TV 채널에서 템플스테이의 일상을 본 적 있었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대웅전 앞을 거닐다 담백한 사찰음식으로 끼니를 하고 지저귀는 새들과 목탁 소리 가득한 불당에 앉아 생각을 비워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매일을 물질 중시의 늪에서 지내는 회사원이 정신적 디톡스라는 성숙한 계획을 세웠다는 점에 작은 뿌듯함을 느끼면서.
함께 근무하는 동기 형과 도심에서 50분 거리의 어느 사찰로 향한 다음 주. 나름 1박 2일 일정이라고 간식거리를 사 가야 하나 싶었지만 몸과 마음의 불순한 때를 벗겨내고자 의도한 정화의 행보였기에 속세의 것들은 최대한 내려놓고 출발하기로 했다.
구불구불한 산속 오솔길을 지나 도착한 사찰은 자그마했다. 짐을 풀기 위해 숙소로 향하는 중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다.
“대리님~ 부탁드릴 사항이 있는데요~”
“안녕하세요 부장님, 문자로 남겨 주시면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저 템플스테이 들어와서 한 이틀간 연락이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양해 부탁드립니다.”
“네? 템플스테이? 아, 절요? 알겠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일터에 당당하게 선언까지 했으니 짧게나마 정말로 뜻깊은 주말을 보내고 돌아가겠노라.
조끼 형태의 황토색 법복을 걸치며 일과가 시작됐다. 예불을 드리려 선 법당은 조용했다. 고요 속 스님의 염불이 멋들어지게 울려 퍼졌고 우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을 하니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머리도 가벼워지매 참 좋았다. 너무 좋은 나머지 상체가 뒤로 기우뚱할 정도로. 기울기가 70도를 넘기 직전에야 정신이 들었다. 하마터면 졸다가 넘어질 뻔했다. 살짝 옆을 보니 형의 몸은 앞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오뚝이처럼 흔들대던 아슬아슬한 참선의 시간이었다.
이어진 차담에서 스님은 말씀하셨다. ‘명상 중엔 본인 스타일이 나오는데, 한 분은 몸의 중심이 뒤쪽으로 가는 것이 안정감 있으셨던 것 같고 다른 분은 앞이신 것 같네요.’ 우리가 존 사실을 못 알아채신 건지 아니면 아셨음에도 그저 유려하게 넘어가고자 하신 건지 몰라도 그 차분한 말씀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산나물이며 건강한 재료로 차려진 저녁 공양을 마치고 사찰을 한 바퀴 돌았다. 산들바람에 풀잎이 부딪치는 소리, 그 위에 얹힌 풀벌레 울음을 들으며 자연의 생기발랄함을 양껏 느꼈다. 평화롭고 또 조화롭기까지 한 분위기에 가슴이 탁 트였다. 이 맛에 템플스테이하나 보다.
온돌 바닥에 엎드려 수양록을 작성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8시 30분이었다. 머리도 맑아진 와중 이상하게 허한 감이 들었다. 옆에서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던 형이 배고프지 않냐 물었다. 그래, 뭔가 부족하다 싶은 게 이거였구나. 사찰 밥상을 맛있게 싹싹 비웠다지만 4시 반쯤 먹었으니 충분히 배고플만했다.
식당으로 가 식은 밥이라도 얻어볼랬더니 역시나 불이 꺼져있었다. 행여 정적을 깨워 스님들께 피해를 드릴까 봐 까치발로 방에 돌아왔는데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핸드폰을 보여주는 형.
“야, 근처에 치킨집 있다. 한... 2킬로 안?”
“ㅋㅋ미쳤나? 여기 절이다.”
“아니, 받아가지고 밖에서 먹고 들어오면 안 되려나?”
“에이~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무슨. 그냥 하루만 좀 참자.”
다시 찾아온 평정심 속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다 보니 9시 30분이 됐다. 샤워하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더 크게 들려온 꼬르륵 소리에 옷을 벗다 말고 생각하다 문을 빼꼼 열었다.
“형, 저 거기 뭐야 치킨집, 전화라도 한번 걸어볼까?”
시골의 치킨 집은 일찍 문 닫는 건지 아니면 사찰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자동으로 필터링 되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줄을 놓아버린 수련생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냈다. 편의점. 가장 가까운 곳이... 21킬로. 해볼 만하다.
밤의 사찰은 정말 어두웠다. 돌계단이 잘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살금살금 주차장으로 가는데 성공했다. 살짝 걸고자 한 시동 소리는 유난히 컸고, 스님들께 들킬까 봐 (아마 들켰을 거다) 걱정하던 와중에도 조심히 그러나 날렵하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좁디좁은 산길을 용케도 통과해 도로에 올랐다. 예의도 아닌 것 같고 이러다가 부처님께 벌받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됐지만 이성은 이미 아득히도 멀어져 있었다. 황톳빛 법복을 걸친 채로 단짠단짠을 위한 탈주를 해 도착한 어느 편의점 앞. 셔터가 내려지려던 문을 막고 들어가 과자며 군것질거리를 닥치는 대로 집어 들었다.
길거리에 서서 먹던 라면과 소시지는 정말로 꿀맛이었다.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물론 오밤 중에 라면 먹으러 산에서 내려온 것 자체가 번뇌에 휩싸여 벌어진 일이었긴 했지만.
“형, 이게 다 부처님의 은덕이 아닐까?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음을 알려주시려는?”
“천오백 원짜리 라면 국물이 3만 원짜리 전복 물회 육수 같다. 원효대사가 해골물 마신 일화 생각나네.”
차를 끌고 사찰 안까지 들어가기가 눈치가 보여 (뱃속이 두둑해지니 그제야 정신 차린) 산 중턱에다 주차하고 걸어 올라갔다. 일탈 전과 똑같이 밝은 달빛을 등불 삼아 한발씩 내딛자니 왠지 모를 머쓱함이 들었다.
1박 2일 짧은 시간에나마 물질주의를 벗어나 정신적 충만감을 찾고자 했다만 하룻밤을 채 견디질 못했다. 짜인 계획이나 일상의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아이를 일러 반항아 혹은 문제아라고들 한다. 직접 정한 목표마저 은근슬쩍 벗어났다가 말장난 늘어놓으며 돌아온 우리는 템플스테이의 반항아들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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