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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11 오늘 할 일 내일 할 일

기억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가장 피하고 싶던 경험은 충치 치료였던 것 같다. 처음 치과 가던 날, 코 끝을 찌르는 특유의 냄새에 온몸을 짓눌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뭔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무서운 냄새에 후각을 지배 당한 것에 모자라 더 무서운 소리까지 들려왔다. 뭔가를 깎고 자르는 듯한 효과음이었다.

 

‘위잉 윙-’ ‘쉬이-이익’

 

 

할아버지 동네 철물점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날카로운 마찰음에 엄마 손을 더 꼭 붙잡았다. 내 마음도 모르는 얄미운 간호사 누나가 진료실로 데리고 가기 전 까지었지만.

 

“자, 이제 입 한 번 크-게 벌려볼까? 아~”

 

친절한 의사 선생님에게서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도 첫 등장 땐 세상 다정한 할머니였으니까. 어쨌든 이미 분위기에 위압되어 있는 상태였던지라 경계심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의자에 기대어 입을 벌린 상태로 슬쩍 둘러보니 갖가지 장비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둥근 모서리의 청진기나 체온계에 익숙하던 눈에 들어온 뾰족하고 차가워 보이는 쇠붙이들. 일단 기본이 다 손에 거머쥐기 좋은 꼬챙이었는데 칼이며 창 비슷한 것에다 드릴까지 보였다.

 

세상에, 드릴이라니! 만화영화 속 악당들이나 쓰던 그 드릴! 굉음과 함께 뭐든 뚫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어느새 선생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진 순간 기다란 뱀 같은 것이 입안으로 쑥 들어왔다. '쉬익-'하며 공기 중으로 빨려 들어간 혀는 뱀 대가리에 철썩 붙어 버렸고 이어지는 건 단말마의 비명 소리였다.

 

“으아ㅏ아아아아아ㅏ악!”

 

흡입 호스에 혀가 철썩 붙은 채로 파닥거리는 모습에 치료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멈춰진 드릴질과 혼비백산. 나의 첫 치과 방문기였다.

 

치아 치료에 대한 필요성을 이해하게 된 이후에도 치과에 대한 거리낌은 여전히 어린 시절에 멈춰져 있었다. 그랬기에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다 어금니가 시려도 애써 무시했고 욱신거려 와도 스읍-스읍- 바람 몇 번 마셔대며 몰려오는 통증이나 덜어내고자 했다. 빨리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일단 내일로 미룬다. 다음날은 또 그 다음날로 미루고.

 

치통에 밤을 꼬박 새우고 나서야 비로소 근처 치과를 검색하게 된다. 더 미루다 가는 힘들어질 뿐이란 결과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끝의 끝까지 가서야 결심하는 치과행은 언제나 반복되는 참담한 레퍼토리다.

 

 

껄끄러움의 대상을 피하려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지 싶다. 만약 꼭 해야 하는 것이라도 일단 지금은 미루고 싶은 바람. 설령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조삼모사의 경우일지라도 당장 덜 불행하고 싶으니까.

 

시간이 흘러 흘러 치과 비슷한 것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보고라든지 회의 준비라든지 메일 회신 같은. 그 업무라는 것들의 중요도나 시급성에 따라 몇 시간에서 며칠의 기간이 주어지게 되고 언제부터 챙겨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 일을 하며 받게 될 스트레스의 정도, 마무리했을 때의 후련함을 저울질해가며 일정을 짠다.

 

다음날의 퇴근시간이 대신 늦춰질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외면하게 되는 오늘의 업무들. 방향성을 잘못 설정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거나 갑자기 다른 업무까지 받게 되는 진땀 나는 경우가 있다 해도 이번에도 첫 수는 칼퇴다. 받자마자 착수하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만 여태까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인생은 모험이니까, 일단 지금은 제낀다.

 

오늘 할 일은 그렇게 내일 할 일이 된다. 거리낌이 들어 미뤘고 미루다 보니 또 미루게 됐다. 아마 다음에도 (기꺼이) 그럴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