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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10 반품 연대기 : 초록이, 상담원 그리고 냉장고

목이 말라 냉장고 문에 손을 댔다가 그냥 찬장에 쟁여뒀던 물을 꺼내 마셨다. 미지근한 목 넘김이 별로였지만 그 녀석을 마주하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매주 토요일엔 한 주간 먹을 식량을 배송받곤 한다. 대문 앞에 놓인 커다란 종이봉투에 잠시 흐뭇해한 후 곧바로 급해지는 마음. 빨리 냉장고에 넣어줘야 하는 신선식품이 이번 주엔 특히나 많았다.

 

5일간 열심히 출퇴근했으니 주말엔 단백질 혹은 프로틴을 섭취해 줘야 마땅했다. 신중한 고민 끝에 뫼시기로 한 건 제주에서 오신 흑돼지님. 비닐 뒤로 보이는 고기색이 살짝 짙어 보이는 듯했지만 흑돼지님 용안은 원래 그런가 보다 하며 포장을 뜯었다.

 

 

선홍빛 살코기와 하얀 비계 그리고 그 옆 초록색 부분. 초록색? 초록색이 왜 있지?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들여다봤지만 분명히 녹색이 섞여 있다. 초록 초록한 빛깔이 아닌 뭔가 거부감이 드는 탁한 색깔에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더 심했던 건 역한 냄새였는데, 맡자마자 올라온 헛구역질에 1년 전 먹은 삼겹살을 만날 뻔했다. 유통기한은 아직 5일이나 남아있는데.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 제대로 상한 게 왔다.

 

1도 3도 아닌 2마트 몰에서 쓱 배송 온 쓱은 고기를 반품 접수하려 했다. ‘상담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며 통화 예절을 강조하는 안내음 이후엔 상담이 불가하다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주말이라 이메일 문의만 가능하단다. 이미 맛이 간 고기긴 했지만 일단 답변이 오기 전까진 보관해야겠다 싶었다. 초록이는 그렇게 우리 집 냉장고에 체류하게 됐다.

 

 

 

 

월요일 오후 세시가 되었지만 문의에 대한 답변은 ‘작성 대기 중’ 상태였다.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통화 연결음을 열다섯 번 정도 듣고 나서야 연결이 됐다. 절차에 따라 일단 상품 회수를 해야 한단다. 여섯시 전까지 준다는 담당자 연락은 오지 않았고 기다리다 지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상담 시간이 아닙니다. 평일은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어쩔 수 없이 초록이를 데리고 있어야만 했다.

 

화요일, 여전히 답변은 작성 대기 상태였고 상담 연결은 종일 어려웠다. 녹색 친구를 하루 더 재웠다.

 

수요일에는 일단 연결이 됐다. 변색된 고기 사진을 보내주며 빠른 환불을 요청했지만 회수를 해야 하니 기다리란 말만 들었다. 목요일 저녁에 찾아가겠단다. 이날도 초록이를 머무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날이 갈수록 주객이 전도되어 갔다. 냉장고 대신 찬장에서 꺼내 마시게 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처럼 은근슬쩍.

 

목요일 아침 9시가 되자마자 고객센터에 연락을 했다. 다섯 명째의 상담원을 만나 다섯 번의 본인 확인을 한 날이자 점잖은 고객이기를 포기한 날이기도 했다. (전화 돌려막기에 이어 환불 금액을 포인트로 준다니!) 그냥 돈과 고기 둘 다 내다 버릴까 하다가 괘씸해서 한소리 해야겠다 싶었다.

 

 

“저기요, 썩은 고기를 보냈으면 바로 찾아가던가 아니면 그냥 폐기하라고 해야지, 고객이 5일이나 들고 있게 하나요? 구멍가게도 아니고 하자 있는 상품에 대한 대처가 무슨 이래요??”

 

“네~ 고객님~ 불편을 드려 일단 죄송합니다. 그치만 목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 사이에 배달원이 제품을 회수할 예정이라고 접수되어 있으신데요??”

 

절차상 어쩔 수 없어서 죄송하다면서도 여하튼 밤에 수거하겠다는 일관성 1등인 대처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1마트 몰로 이름 바꿔줘야겠다.

 

냉장고를 열지 않게 된 며칠이었다. 열지 못하게 됐다는 게 좀 더 정확하겠다.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소름 끼치는 초록색이 보일 것 같아서. 꽁꽁 싸맨 비닐 사이로 악취가 새나올 것 같아서.

 

절차와 규정 그리고 원리원칙. 직급, 직책, 나이와 상관없이 조직 구성원들의 최우선 덕목이긴 하다만 남의 일에 있어서는 유독 철저해지는 편이다. (역시나 직급, 직책, 나이와 상관없이) 본인이나 지인 일의 빠른 처리를 위해선 어느 정도 관대하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거 다 아는데...

 

얼기설기 엮인 사회에선 상황이 언제 뒤바뀔지 모른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라지만 먼저 물 한 컵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내가 되길.

 

네가 그래준다면 더 좋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