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저 사실 요즘 너무 힘듭니다…’ 커피잔을 내려놓는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이 됐다. 따뜻하게 챙겨주거나 어줍잖은 조언을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깐.
월 마감을 무사히 끝낸 오후는 꽤나 여유로웠다. 팀장님 이하 고참 선배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새를 틈타 커피나 사와야겠다 싶어 일어났다. 순간, 대각선 파티션 넘어 머리 하나가 퐁 튀어 올랐다. 뛰어오른 두더지는 반년 전쯤 입사한 두번째 후배. 내 것만 사러가기 조금 그래서 ‘뭐 하나 사다 줄까요’ 물으니 저도 같이 나가고 싶단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후배는 따뜻한 라떼를 시켰다. 테이크 아웃을 하려다 모처럼 나왔는데 잠시 앉아있다 가자며 머그잔에 바꿔 받았다. 두 손으로 잔을 꼭 감싸쥔 후배와 마주 앉았다. 날도 더운데 무슨 따뜻한 커피냐고 생각했는데 에어컨 바람에 순간 으슬해졌다.
그냥 앉아 있기 뭐해서 요즘 할 만하냐, 식상하면서도 꼰대 같은 질문을 했다. 잠시 멈칫하더니 싱긋 웃는 후배. 저건 그냥 두면 위험해질 미소란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려놓은 듯한 위험한 웃음이다. 적게나마 축적된 직장 짬밥 상자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여태껏 후배와 대화를 나눈 기억이 별로 없었다. 저쪽서 먼저 다가오거나 도와달라고 요청할 때말고는 건조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했었다. 아마도 불편해할 거란 지레짐작에서, 또 여사우와 쓸데없는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기에 거리를 뒀었으니까. 그랬기에 힘들다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는 후배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많이 힘들었냐며 서로 어려웠을 첫 마디를 꺼냈다. 10초간의 정적 후 후배 입에선 신입사원이 힘들어할 만한 에피소드들이 나왔다. 지난지 얼마되지 않은 나의 그 시절이 분할화면처럼 함께 떠올라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렵다. 그 시절이 내게도 있었기에 공감은 되나 어떻게 해결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정작 나조차도 고작 2년 선배일 뿐이었으니. 그래도 녀석 손에 뭐라도 쥐여 보내고 싶었다. 나한테까지 이야기할 정도라면 정말 지푸라기라도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테니까.
스트레스에 비해 보람 적은 일상, 업무 나고 사람 난 듯한 특유의 분위기에 지친 후배를 보고 있자니 콜라 없이 입안 가득 퍽퍽살을 씹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던 새 네 음절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퍼센트."
"네?"
"아, 음, 잠시만!"
떠오른 것은 나의 선배로부터 들은, 그리고 그 선배의 선배로부터 전해왔다는 이야기. 괜히 말했다가 행여 오해나 살까 봐 공유하기에 사뭇 망설여지는 회사 뒷골목(?) 이야기였다. 하지만 궁금해하는 까만 눈동자와 그와 대조된 허옇고 지친 얼굴이 보이자 말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40퍼센트."
"네??"
"별건 아니고, 당분간 네 역량의 40퍼센트 정도만 회사에서 발휘해보라고."
"음, 일을 덜 하란 말씀이세요?"
"아니지~ 월급 받는데 일 해야지. 다만 지나치게 애쓰지는 말라고. 내가 이런 말 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너 요즘 할 수 있는 거에 비해서 너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한숨 쉬는 빈도도 잦아졌고 소리도 커졌어."
"죄송합니다…"
"아니야ㅎㅎ 뭐라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걱정돼서. 직장인 번아웃 사례 많잖아. 처음 왔을 때보다 말수도 줄어들고 표정도 어두워졌길래."
"..."
"취미나 좋아하는 거 있니? 당분간 하루 에너지의 4할만 회사 업무에 투자하고 남은 힘은 퇴근 후에 너 하고 싶은 일에 써봐. 시간과 체력이 부족해서 못해본 것들, 미술학원을 다녀보는 것도 좋고 피아노 소나타를 완곡해보는 것도 괜찮고. 퍼즐 맞추기나 실내 암벽 등반도 많이들 하더라."
팀장님 몰래 인사팀 몰래 비사(秘事) 느낌으로 암암리에 구전되어온 ‘40퍼센트론'. 그렇게 오늘 또 한 명의 전승자가 탄생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지 모를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가 짚어주는 주제의식은 아마도 우리 세대의 최대 관심사인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일은 제대로 하려고 하면 끝이 없는 법이란다. 할만큼 했다면 오늘의 업무는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래서 퇴근 시간이란 게 있는 거고. 오늘만 사는 것처럼 능력의 150퍼센트를 발휘해봐도 모든 일을 끝낼 수가 없다. 마라톤처럼 롱런하는 회사생활에서는 페이스를 지켜야 한다. 특히 초반 구간에서는 보다 여유롭게 체력 안배를 해줘야 한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흥미를 잃거나 지쳐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지켜낸 60퍼센트의 에너지로 어느 정도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해봐야 취미생활에다 고작 한 두시간 남짓이겠지만, 그 순간 찍힌 사진을 본다면 우리도 활짝 웃을 줄 알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거니깐.
‘언젠간 상황이 나아질 거다’ 혹은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말해주는 게 가장 뒤 탈 없고 편한 조언이기도 했지만 몇 없는 후배라고 괜히 걱정됐다. 그 오지랖 덕에 후배 얼굴은 들어오기 전보다 밝아 보였다. 선배라는 게 말도 안되는 농담을 했다 싶어서인지, 정말로 그 은밀하고 위대한 이론을 따라보려는 마음이 생긴 건진 몰라도 웃더라. 바라건데 이번 웃음은 진심이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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