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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101 비전문직은 웁니다

"그래서 퇴사하면 뭐할건데?"

"로스쿨 가려고. 한국이랑 미국 변호사 자격 둘 다 딸 수 있는 코스가 있더라고."

"잘 생각했다~ 백날 사원질 해봐야 어따 쓰냐."

"이럴거면 진작 갈 걸 싶기도 하고. 아무튼 몇 년은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해야지."


또 한 명이 떠났다. '김사원'에서 '킴변'이 되기 위한 먼 길을 떠났다. 연수원에서 회삿밥 첫술을 함께 뜨던 입사 동기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1년 차엔 기대와 다른 회사생활에 지쳐버렸다는 점이 퇴사의 주된 이유였다면 이후부턴 좀 더 감정을 빼고 고민한 뒤 새로운 길을 도모하게 된단다.

 

대학생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가장 빠른 루트는 졸업 직후 취업이다. 일반적으로 4학년 1학기에서 2학기 사이에 열리는 신입사원 공채를 통해 기업에 입사하게 된다. 아니면 ○○고시나 △△자격증 시험을 위해 공부를 좀 더 하거나. 양 갈래 길 앞에서 꽤 고민을 하게 되지만 다수의 학생들은 빠른 결정을 내린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도합 16년 간 공부하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날개를 펼쳐 세상 구경도 좀 해야겠다 싶어서. 이미 회사원이 된 선배들이나 주변 어른들을 뵐 때마다 변호사니 회계사니 자격증 시험을 치라길래 고민도 됐다만 젊은 날을 도서관에서 더 보낸다면 너무 슬퍼질 것 같다. '요즘 시대에 전문직이 큰 의미가 있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고통 받느니 차라리 빨리 사회로 진출하는 게 낫지!'

 

 

이십대 중반 즈음 목에 걸게 된 대기업 사원증은 착용자의 자신감을 키워준다. '제때' '잘' 해냈단 점에서 자존감도 높여준다. 취업 대란 시대에서 제 나이대에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으니까. 많진 않지만 꽤나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월급이 매달 들어오고 소개팅도 잘 들어온다. 부모님에게 용돈도 드리며 나름 효도도 해보고 휴가 땐 바다 건너 저 어딘가에서 여유도 부려 본다. 시험도 없고 과제도 없다. 물론 매일 해야 할 일이 쌓여 있고 평가도 받는다지만 확실히 학생들 때보단 부담 적은 일상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3년 차에 다다르던 어느 날, 도서관에 박혀 문제집만 풀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몇 년간 준비한 시험에 드디어 합격했단다. 곧바로 나온 축하한단 말엔 정말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조만간 만나서 회포를 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목요일 오후 2시, 그에게는 낮술로 축배를 들어도 될 시간이었겠지만 내게는 평일 업무시간이었으니까. 통화를 마친 뒤 눈 앞에서 깜박이는 마우스 커서를 20초는 멍하니 쳐다봤을거다. '짜식, 부럽다...'

 

 

 

 

김 변호사님과 재회의 자리는 대학생 시절을 상기시키는 카레가게였다. 지금은 내가 그를 부러워하지만 그땐 그 쪽에서 날 부러워했단다. 매일 아침 도서관으로 향할 때면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참 좋아 보였다고 한다. 또래 회사원들의 말끔한 모양새가 눈에 들어오면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의 본인 복장에 괜히 슬퍼져 담배를 한 대 더 물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단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고생하는지, 꽃 같은 젊음을 불태우면서까지 도달해야 할 가치가 있을지 일주일에 세 번은 고민했다고 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았기에 이런 속마음까지 말한다는 얼굴은 밝으면서도 굳세 보였다.

 

땀 흘린 자가 마땅히 누릴 자격일거다. 주말이면 업로드 되는 회사원 친구들의 SNS 피드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느라 고생했을 거고 왜 아직도 도서관 지박령 신세일지, 혼자 고민하던 시기도 견뎌냈을 거다. 어두운 고치 속 우화를 기다리는 나비처럼 도서관 가장 깊숙한 곳에서 '사(士)'자 타이틀을 위해 버텨왔을 테니깐.

 

학생 때도 그랬겠다만 비전문직 직장인들에겐 더욱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 이름 전문직. 연차가 찰수록 전문직군이 부러워진다. 평범한 회사원들에게 종종 찾아오는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혹은 '이 대접받아가며 다녀야 하나' 같은 현자타임. 그치만 뚜렷한 기술이 없어 이직도 힘들 뿐 더러 지금 신세에서 다른 곳 가봐야 비슷한 삶이 예상되니 그냥 입 다물고 다니게 된다.

 

전문직도 초기엔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가 많긴 하다만 빠르게 상승하는 몸 값에다 수 틀리면(?) 개인 사업을 해버릴 수도 있으니 적어도 위염 장염 겪어가면서 억지로 일하진 않지 않을까? (이 말을 들은 전문직들은 아니라며 손사레를 쳤지만 그래도 격하게 흔들진 않더라)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쌓을 순 있단다. 영업이니 재무니 마케팅이니 직무로 나눠져 있는 팀에서 뭐든 오래하다 보면 나름 갖출 수 있긴 할거다. 그치만 밖에서 바라본 그들은 전문성이 있든 없든 똑같은 회사원이다.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는 건 결국 자격증명서를 소지한 진짜 전문직들인 걸 보면서 그간 편한 자리에 안주하며 시간을 흘려보낸 건 아니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실속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전문성 알맹이가 중요한 건지 전문직 직함이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고시반으로 향하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면접용 정장을 고르며 멋진 어린 사회인이 되고 싶었다. '멋진' '어린' '사회인' 형용사 두 개와 명사 하나의 조합이 읽기도 참 힘들다고 느꼈는데 역시나 셋은 함께 하기 힘들었다. 연차가 쌓이며 정직하게 늘어나는 나이로 인해 두번째 단어는 먼저 안녕~ 멋쟁이 직장인은 언제 가능할지 가늠이 안 된다. 1년 차일 때 ●●회사 사원이라고 불렸는데 2년 차일 때도 밖에서 보는 모습은 ●●회사 사원, 3년 차에도 같은데 대체 언제 멋져지냐? 진급을 하고 성과를 내고 팀장이 되면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 내일 가면 옆자리 부장님께 여쭤봐야겠다.

 

다시 돌아가면 취업 안하고 자격증 공부할 거냐 스스로 물어봤고, 의외로 '아니'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약 없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레이스는 너무 고될 것 같단다. 취업 후 위험 감수에 소극적으로 변한 성향은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도전할 자신은 없다만 부러워하는 마음은 더 커져 가기만 하니 비전문직은 그저 울 뿐이다.

 

전문직에 도전하지 못한 혹은 않은 것에 대한 소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유로 합리화도 하고 실패했을 경우에 대한 가정까지 해보니 현재 일상마저 감지덕지다.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것보단 그래도 나은 신세 아니겠어?'

그래도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한 덕에 경력도 어느정도 쌓았고 돈도 좀 모았다. 학생생활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께 추가적인 부담도 드리지 않았다. 월급 내에서 알뜰살뜰 살아가는 생활력도 길렀다.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비전문직들은 사실 멋지다. 충분히 멋지다. 가끔 한숨 쉬고 또 울때도 있지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