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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김사자 』

[신입사원김사자] Ep.100 그래서 이번엔 감사해보기로 했다

입사 4주년을 맞아 옛 메일 계정을 열어봤다. '○○ 채용담당자입니다' 로 시작하는 메일이 한움큼이다. 지금은 사용 않는 이 계정에 2016년 신입사원 공채 땐 하루 몇 번이고 접속했었다. '안녕하십니까' 건조하게 인사하는 메일을 지나다 드디어 조금 친밀한 느낌의 '안녕하세요' 가 나왔다. 서류가 제출됐다는 확인 메일, 면접에 대한 공지와 그 결과들을 넘어 합격자 건강검진 요청이 왔을 때쯤이었을 거다.

 

가장 위에 있는 메일은 채용페이지 장기 미접속 회원 정보 삭제 안내였다. 1년 이상 로그인 기록이 없는 회원의 정보를 폐기할 예정이라 공지한게 2017년이니 내 입사 지원서는 이미 삭제됐겠지. 취업의 기쁨과 감사한 마음도 덩달아 사라지기 시작한 그 자리엔 슬픔과 고됨이 비집고 들어왔다.

 

 

홈화면으로 빠져나가려다가 어플 좌측 상단 메뉴에 손이 갔다. 임시 보관함. 당시 썼던 자기소개서와 면접 예상질문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옷장 깊숙히 박혀있던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다. 마침 주말 낮이라 시간도 있겠다, 차례로 열어봤다. 생각보다 양이 많아 속독하듯 대각선으로 읽어나가다 어느 항목에 눈이 멈췄다.


*멘토/롤모델은 누구인가?

저의 멘토님은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아 마음고생을 하던 제게, 도전의 기회를 부여받았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전해나가자 하셨습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은 그 후에도 어려움에 부닥쳤을때 차근차근 방향을 찾아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에서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제게 주어진 성장의 기회에 감사하며 목표를 달성해나가고자 합니다.


와 소름. 도전의 기회를 부여받았음에 감사한단다.. 매사에 감사한단다.. 성장의 기회에 감사하겠단다.. 전형적인 입 바른 멘트의 향연이다. 학교 취업상담센터 선생님의 팁을 듣고 작성했던 것 같은데, 마이웨이주의인 내가 저런 걸 준비했으니 그땐 어지간히도 합격하고 싶었나보다.

 

이제는 옅어져버린 감사의 정신으로 무장했던 4년 전 오늘은 입사지원서를 낸 날이었다.

 

 

 

 

'감사'라는 두 글자는 어쩌면 직장인들과 가장 가까운 단어가 아닐까 싶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안녕하세요' 다음으로 많이 한게 '감사합니다'였던 걸 보면. 모르는 것투성이에다 배우는 입장이다 보니 모든데다 감사하다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자동응답기 수준으로 튀어나오던 그 말은 출근 일수가 늘어나면서 서서히 잊히게 됐다.

 

신입사원 공채에 합격했던 순간은 유치원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농부 아저씨와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으로 식사하자는 노래를 부르며 따끈한 밥을 먹을 수 있어 정말 행복해했던 기억. 사원증을 목에 걸자 그때처럼 감사함이 밥내음처럼 피어났었다. 고소하고도 달달했던 그 마음이 이젠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연차가 쌓이니 안 좋은 것부터 먼저 보인다. 눈 앞의 대부분은 악습이나 꼰대, 상명하복 같은 지랄 맞은 무리들이다. 나머지 시야는 담배 연기가 채우게 됐다. 담배를 피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흡연자 선배들을 따라나서고 있다. 연초까지 따라 물 생각은 없지만 시원한 바깥 공기에 잠깐이나마 출근했단 사실을 잊을 수 있다.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뭉개구름이 사무실 안밖의 분위기 차를 극대화한다. 회사 다니면 담배가 는다는 말이 대충 이해간다. 줄어든 담뱃대를 보아하니 2분 뒤면 다시 들어가겠다. 사소한 것에 감사해하던 옛 나날이 멍청할 만큼 순진했다며 괜히 바닥의 꽁초나 눌러 밟는다.

 

감사하다는 것이 다 무어냐? 실날 같이 남아있던 마음마저 희미해져 가는 마당에. 자정까지 계속 수당 없는 야근을 하는 내가 불쌍해서, 받는 이상으로 일하는데 따뜻한 한마디 듣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조직에 덧정 없어지는 현실이 슬퍼서 감사는 늘 뒷전이었다.

 

부모님께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셨다. 그 좋은 말씀을 절반밖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감사하며 살고 있긴하나 '늘' 하기란 힘들어서. 하나를 얻으면 둘을 원하고, 산 봉우리에 올라서면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는게 보통 사람의 심리란다. 가진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안고 산다만 의식하지 않으면 짜증났던 기억이 머릿속을 차지해버린다.

 

입맛만큼 기분도 자극적인 쪽으로 쏠린다. 개중에 슬픔이나 화는 라면스프 같아 소량으로도 다른 정서를 금세 덮어버린다. 감사라는 마음은 대체로 담백하니 뒷전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회사에서도 분명 감사한 일이 있긴 하다. 사회 첫 동료인 동기들, 초짜 시절 만난 선배들, 나는 친하다고 생각하는 후배들이 그렇겠다. 본부를 옮기며 신입 아닌 신입이 됐을 때 누나처럼 형처럼 챙겨준 새로운 팀원들도 다 고마움의 대상이었다. 함께 한 모두에게 감사하다. 진흙탕에서 구르기도 하고 짬짬이 가지는 커피타임에 잡담도 하며 동료애와 정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따금씩 멍멍이 같은 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감사하다. 엿가락 같던 상황들에도 감사하다. 덕분에 그런 부류에 대한 경험도 쌓을 수 있었으니깐. 회사원으로서의 고뇌와 현실에 대한 실망, 체념 등을 느낀 순간조차 고맙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도 이젠 어느정도 내성이 생겼을테니.

 

 

사람은 한 번에 하나의 감정씩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Emotion의 어원은 라틴어로 '움직이다'를 뜻하는 Movere란다. 생각할수록 생 짜증만 불러일으키던 것들이었는데 억지로라도 땡큐 포인트를 찾아보니 의외로 마음이 편해졌다. 그치만 여전히 더부룩한 느낌은 왜일지.

 

퇴근하면 종종 음악을 듣곤 한다. 감상을 위해서라기보단 싱숭생숭해지려는 마음을 피하기 위해서. 스피커에선 밴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부른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흘러나온다.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Bravo를 외친다는 가사가 귀에 꽂히는 걸보면 나도 참 고생했구나. 그렇게 달려온 회사원 라잎이 어느덧 5년차에 접어들었다. 

 

늦은 퇴근 후에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누였다. 종일 홀로 서 있던 목을 뭔가가 잡아주니 편한와중에 어색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밤잠 설치는 저녁이 반복되던 참이었고 숙면을 위해 누운 채로 심호흡 몇번 했다. 여전히 답답하지만 피로가 더 크니 오늘도 결국 잠은 들겠지하면서.

 

5년 차되면 괜찮아질줄 알았는데. 허허벌판에 서 있는듯한 회사생활은 여전히 적응이 어렵다. 유난히 처량함이 몰려오던 밤, 위로가 필요했고 나도 모르게 취한 사람처럼 말했다. '고생했다... 고맙다...'

그날은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감사의 대상에서 나를 빼먹었었다. 가장 인정받아 마땅했는데. 그래서 이번엔 감사해보기로 했다. 나한테 고마워해보기로 했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데도 건강해줘서 고맙다, 스트레스에 지치지 않아줘서 참 고맙다, 피곤한 와중에 운동하고 글 써줘서 더 고맙고, 감정적으로 때려치우지 않아줘서 정말 고맙다.

 

마침내 트림 한번 시원하게 해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