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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9시, 가평 리조트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화상 영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왁자지껄한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브리티시 엑센트의 런더너와 에어비앤비 인원 감축 이슈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놀러가는 와중에 그거 꼭 해야 하나고 참 어지간한 놈이라 소리를 들어가며 꿋꿋하게 수업에 참여했다. 웨이크 보드 타러 가기로 한 친구들과의 약속도 중요했으나 주말 아침에 화상 영어 수업을 예약해둔 지난 주 나와의 약속은 더 중요했다. (회당 4만원이 넘는 수강료가 아깝기도 했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40분 동안 핸드폰을 들고 있는 새 내 마음도 몇 번이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짓궂은 친구들은 이따금씩 핸드폰 카메라 앵글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학생인 현지 튜터는 재밌다며 깔깔 웃고 말았다만 집중이 힘들어 둘 다 얼른 끝나길 바랬던 수업이었을거다. 오전 9시 40분, 그렇게 그 날의 수업도 무사히(?) 끝이 났다.

 

 

온라인 화상 서비스를 통해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유학까지 다녀와놓고 무슨 영어공부냐는 질문엔 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외 사업까지 담당하는 수준에서 뭘 더 하냐고 물어 오는 말에는 원어민 파트너들과의 협의 시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 답한다.

 

대답은 멋지게 했다만 제대로 준비해서 수업 참석한 적이 언제였나 모르겠다. 시작할 때만 해도 규칙적으로 공부하겠다는 마음 가득이었지만 정말 마음 뿐이었나보다. 숙제 제출은 커녕 본문라도 읽어간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으니까. 학원을 오가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선택한 화상 영어 수업이었지만 그마저도 챙기기가 쉽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부터 본업이 더이상 공부가 아니게됐듯 일하고 남는 시간에 짬짬이 공부하는 건 생각보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부모님 등골 브레이킹해가며 낸 학원비가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부여잡게 된 영어였다. 평일엔 출퇴근만 주구장창, 주말엔 빈둥대는 일상 속 뭐라도 해야겠다는 위기감에서 모처럼 읽게 된 요놈의 꼬부랑 글씨는 영 어색하기만 했다.

 

꼬리가 퇴화하고 남은 흔적이라는 꼬리뼈, 날개가 있던 자리의 날개뼈처럼 어럼풋이 남아있는 잉글리시에 대한 기억. 꽤 오래 서로의 생사도 확인 않다가 재밌다는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야 비소로 만나는 그 언어와 서먹해진 요즘이다. 한 때는 단짝이기도 했는데.

 

이따금씩 아버지와의 통화 중엔 ‘요즘은 뭔 공부를 하고 있냐’는 질문을 들을 때가 있다. 매월 들어오는 월급에서 자기계발 비용을 빼놓아 두어라, 재태크도 좋지만 수입의 일부를 학습에 재투자해야 한다셨다. 아들이 안주하지 말고 계속 성장해나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조언. 그리고 지금 세대에게 평생 직장은 없다는 사회생활 대선배로서의 조언. ‘학원 다니게 용돈 좀 주십쇼!’ 농담하려다 간만에 등장한 부자간의 진지 분위기에 발 맞추기로 했다. “예, 안 그래도 요즘 영어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강의실에서 사무실로 출근 장소를 옮기게 되며 아무도 학습을 강요하지 않는 신분이 됐다. 근무만 별 탈 없이 해준다면 굳이 공부란 걸 할 필요가 없긴하다.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정말로 알 수 없던 학생시절과는 달리 직장인의 내일은 꽤 예측이 되는 편이다. 이렇게만 쭉 살아간다면 잘 되도 약간 더 나은 삶을, 못 되봐야 살짝 뒤쳐지기만 할 뿐일 거다. 누가 연봉이 얼마니, 어디는 보너스를 얼마나 주니 해도, 일반 회사원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위치의 차이는 결국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일터. 일하기도 바쁜 와중에 애쓰고 고생하며 공부할 이유가 없긴 하다. 그래서 보통 직장인들은 공부하지 않는다. 아니, 공부할 필요가 없다. 매일의 노동도 피곤한데 뭔 놈의 공부냐...

 

 

직장인이 됐다. 생활도 제법 안정 되었고 어디가서 내밀 명함도 생겼다. 월급도 받는다. 그만두거나 잘리지 않는 한은 어느정도 먹고 살 수 있을거다.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분수를 모르는 욕심쟁이가 되고 마는 처지이긴 하지만. 또 회사원 그 이후 진로가 잘 보이지 않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렇게 편안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게되는 희한한 위치에 서 있다.

 

회사 다니면서 짧게나마 수업 들으려는 의지가 대단하다는 칭찬에 그저 억지로 하고 있을 뿐이라 대답한다. 대단한 자격증이나 고시 공부도 아니라 남사스럽기도 하거니와 매진하는 마음보다는 안하는 것보단 나을 거란 심리로 하고 있으니까. 하기 싫다 징징대면서도 100% 찍힌 출석부는 그런 깡을 반증하는 걸거고.

 

참 부지런하게 또 유난스럽게도 챙겨온 그 놈의 화상 영어. 빠지에 빠지러 가는 차 안에서 핸드폰을 부여잡은 적도, 노느라 밤을 꼴딱 샌 채로 접속한 아침 수업도 있었다. 이렇게 한다고 극적인 실력 향상이나 변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술 마시고 퍼져버린 저녁이나 테레비만 들여다 본 날보다는 짧은 수업이나마 들은 오늘이 상대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결국 인생은 상대평가니까. (응?ㅎㅎㅎ)

 

억지로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억지로 화상영어 수업을 듣고 있다. 열심히 하진 않지만 그래도 하고 있다. 하기 싫지만 해내고 있다. 작심삼일이라는데 억지로라도 수강한 수업이 30회를 진즉 넘겼으니 열 배는 잘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겠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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