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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98 슬기로운 친구생활

의사 친구들의 슬기로운 일상을 다룬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다.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네 명의 친구들은 밥도 같이 먹고 놀기도 같이 논다. 병원에 묶여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은 직업 특성상 곧잘 마주치는 게 당연하고 드라마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네 친구들은 정말로 자주 본다. 마치 서로 말곤 친구가 없다는 것처럼.

 

'친구'를 소재로 만들어진 컨텐츠는 참 많다. 대놓고 제목에 들어가는 것만해도 벌써 영화에 드라마에 노래까지 몇 개나 떠오르고. 가족 다음으로 가장 가까울 이 친구라는 관계엔 참 요상한 애틋함이 넘치는데, 점잖던 의사끼리조차 '누가 찌개 건더기 제일 많이 먹었냐'며 대판 싸우는 일이 허다하면 말 다했겠지? 걷다가 발을 삐끗하면 바로 옆에서 배를 잡고 웃는, 불난 집에 손부채질하는 그런 미친 우정하는 사이. 아, 물론 큰 불 말고 모닥불 수준에서만.

 

유유상종, 草綠同色,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Is maith an scáthán súil charad.. 끼리끼리 논다는 속담이 동서양에 걸쳐 쓰이는 걸 보면 정말로 비슷한 놈들끼리 친구 먹긴 하나보다. 내 친구도 그런것 같고 그 친구의 친구들도 그래 보인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부모회니 위원회니 어머니들의 모임이 있으셨다. 자연히 반 친구들 중 그 집 애들끼리도 자주 시간을 보냈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모임하는 자리에 아이들도 종종 따라오곤 했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면 걔네 집안 분위기나 생활이 우리 집과 비슷했던 것 같다.

 

어느정도 줏대가 생긴 중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들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학업 성적이나 관심분야, 취향, 그리고 콕 꼬집어 묻진 않지만 행동이나 말에 배어나는 주변 환경이 대충 비슷하다거나. 그런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특히나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서로를 이해하기도 용이했을뿐더러 심중도 비교적 잘 보였으니깐.

 

학창시절 의리로 동여매진 어설프지만 끈끈한 매듭은 젊은날부터 두번의 위기를 만나게 된다. 예상못한 그 관문은 대학 진학때 한번, 취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찾아온다. 함께 교복 바지를 줄이고 매점으로 질주하던 친구들이 대학생이 되며 소원해진듯한 느낌을 받은적이 있다면 관계에 노란불이 켜진거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상투적인 새해 인사나 생일 안부만 묻는 사이로 변해버렸다면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에 닿은거고.

 

 

 

 

대학 친구들과 캠핑을 다녀온 지난 주말이었다. 시덥잖은 가십거리에서 출발한 시곗바늘에 소주와 맥주 또 양주까지 섞이니 그간 별탈없이 잘 지내서 고생들했다는 인사가 나왔다. 어느덧 8년째다. 군대 전역 후 복학했을때 동향이었던 과선배가 학교 앞 편의점에서 소개시켜준 녀석들. (선배도 전 주 학과 술자리서 처음 만난건지라 사실상 초면이긴 매한가지였는데) 머리 짧은 한 명에게 '학군단이에여?' 물었던게 첫 대화였고 그 실수로 우리의 악연은 시작됐지..ㅎ

 

자취생인데다가, 꾸준히 헬스장을 다니고, 소주보다는 보드카나 진을 좋아하고, 서로 계산하려고 나서는 점이 공통점이었다. 예민한 성격의 내가 처음으로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결정했을만큼 만나면 편안했다. 그날도 그룹채팅방에서 급 정해진 야영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짐 챙겨 떠난 가평에서 고기도 굽고 길고양이 밥도 주고 카라반 안에서 포커도 쳤다.

 

빠른 년생이라 한 살 어리지만 덩치부터 가장 의젓한 한 명이 위스키잔에 얼음을 담으며 말 하더라. "학교 다닐 때만해도 다 친했던것 같은데 이제 맘 터놓고 자주 보는 사이도 너네뿐이네.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드니 누구 챙기기가 쉽지가 않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점점 깔때기형이 돼가는 인간관계엔 모르는새 여기저기 필터가 설치되어 있다. 친했던 사이에서조차 언제 발동할지 모르는 그건 마치 자석의 척력과 비스무리하다.

 

삼십대부터 본격적인 사회초년생의 삶이 시작된다. 취업은 이십대 중후반일지라도 몸과 마음이 일정수준 적응하게 되는 시기가 그쯤되지 않을까싶다. 나이 앞자리가 바뀌어도 여전히 정신없는 회사생활과 밥 벌어먹기 쉽지 않은 팍팍한 현실에서 친구들과의 만남은 단비다.

 

예술을 하는 친구, 전문직 친구, 사업하는 친구, 회사원 친구, 아직 공부하는 친구까지 똑같이 소중한 모두들. 졸업 이후 근 몇 년간 살아온 길이 달랐기에 대화의 흐름이 매끄럽진 않을 때도 종종 있지만, 설명을 해주면 되니 별 문제없다. 그런데 그 사이서 특히 자주 연락하고 의지하게 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사회에 뛰어드니 챙길것도 많아졌을 뿐더라 걱정거리도 한둘이 아니다. 위로가 필요하고 조언도 받고 싶다. 직장에서의 고민이나 커리어 관련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다. 여전히 동등하게 친밀한 친구들 중에 종종 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쪽과 먼저 대화하고 싶다. 여가 시간도 줄어들었고 피로도 쌓이다보니 나부터 챙기게 되는건 어쩔수 없나보다. 가끔은 말 좀 덜해도 '척하면 착' 알아들어줬음 좋겠다. 내가 고민하는 문제를 언젠가 해봤을/할 법한 친구들과의 대화에선 모처럼 속이 후련해진다.

 

동질감이 드는 방향으로 몸이 기우는 걸 알아채지만 모르는 채 둘 때가 있다. 같은 밭에 서 있는 허수아비끼린 한 짚단으로 만들어졌고 줄줄이 매인 만국기는 같은 프린터에서 인쇄됐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의 소재나 만들어진 방식이 유사한 걸 알았을 때 부쩍 가깝게 느껴진다. 둘러싼 상황에 맞게 각자의 공감 주파수 대역대가 설정된다. 저 친구보다 이 친구와 자주 이야기하게되는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파장이 맞기 때문일거다.

 

 

공감의 교차점이 희미해지는 순간 낯섬이 찾아온다. 한때 형제처럼 가까웠던 친구 이름이 주소록에서 보일 때가 있다. 언제부턴가 연락하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연중 한번꼴로 생존만 확인하게 됐다. 업(業)이 달라지고 활동분야가 달라지니 꺼내는 대화 소재도 달라졌었다. 학교에서 있던일로 밤새 떠들던 옛 기억이 무색하게 뚝뚝 끊기는 대화로 각자 핸드폰을 확인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속하게 된 사회에 맞춰 성향도 변한건가 싶다. 시간이 흘렀고 은근슬쩍 쌓여가던 거리감은 망설임과 너무 많이 버무려져 버렸다.

 

아쉽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더이상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안타깝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일거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직군과 직업에 따라 각자 다른 상황에 놓이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공감 주파수가 지금은 맞지 않는 것뿐이다. 하루 아침에 쌓은 우정이 아니듯 몇 밤 자고 일어나면 또 상황이 돌고 돌아 서로 맞물릴만도 하니깐. 그러니 내가 할건 그를 여전히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응원하는 걸거다.

 

경제력이 친구 사이 거리를 벌리는 요소기도 했다는 몇 년 위 선배의 경험담을 들은 적 있다. 하는 일에 따라 수입이 차이날 수도 있고 형편 차이로 가용자금이 다를 수 있다. 사정 뻔히 아는 와중에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게 밥이나 한끼 사는 것뿐인 것 같은데 그마저도 조심스럽다. 저쪽에서 행여나 기분 상하진 않을까 염려돼서.

 

어느 한쪽이 눈치를 보고 불편해하는 순간 더이상 예전처럼 지내긴 힘들어진다는 말을 들으며 언젠가 봤던 다큐멘터리의 코멘터리가 생각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로의 위치와 출발점이 정해지고, 조금씩 생기는 격차는 씀씀이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게 뭐가 중요하냐며, 오늘도 먼저 계산해버린 너를 만나기가 나는 미안해진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는건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수반한다. 학교라는 큰 그늘에서 벗어나니 여태껏 보지못한 우리 등 뒤의 그림자가 보인다.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가끔은 그 짙기조차 달라보일 때도 있다. 관계에 크고 작은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시기다.

 

계산대 앞에 서서 '담에 소고기 풀코스로 얻어먹을 거야 임마~' 하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지 피식대는 친구 얼굴이 보일때, 우리 만남이 오늘도 편했던 것 같아 참 좋다. (소는 정말로 얻어먹을 거다)

 

어린 사회인이 되어가며 관계맺기의 중요성과 그 유지의 어려움을 알아가는 참이다. 친할수록 또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됐을수록 쉽지 않단걸 느끼면서. 시간이 더 흘러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를 좀 더 잡게되고 가정도 생기게 되면 난이도가 더 올라갈 거란 걸 짐작하지만 우리는 잘해낼 수 있을 거다. 진심과 배려 편안함이 있어야 오래 간다는, 다소 진부하게 보일수도 있는 슬기로운 친구생활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