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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6시,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세수를 하고 부엌으로 향한다. 아침 메뉴는 프렌치 토스트에 토마토 베이컨 볶음. 오렌지를 직접 갈아먹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마트에서 사온 주스 뚜껑을 딴다. 후딱 아침상을 차리니 젖은 머리에 수건을 돌돌 감은 아내가 나왔다. 출근한 사람을 뒤로 이제 커텐 걷고 창문을 연다. 햇살이 비추는 바닥이 살짝 뽀얀걸 보니 어제처럼 청소 한바탕 해야겠다. 막 내린 커피가 조금 식는 동안은 빨래를 갰다. 라디오처럼 켜둔 TV에선 착즙기 홈쇼핑 방송이 한창이었는데 아침에 못 다 간 오렌지가 생각나 꽤 오래 바라봤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점심시간이다. 회사 사람들과 곰탕집에 왔다는 와이프 메시지를 읽으며 열무김치와 계란 등등을 꺼내 양푼에 털어 넣었다. 귀찮고 입맛 없을 땐 이것만한 게 없으니깐. 슥슥 비벼 마지막 한 숟갈까지 해치우고 밖으로 나가본다. 랩탑에 운동복 한 벌 백팩에 챙겨넣고 헬스장에 도착했다. 등 운동 하는 날이다. 접때 세탁기 돌리는 김에 입고 있던 셔츠를 얼른 벗어 넣었었는데, 뒤에서 들린 '등에 나비 한마리'에 흐뭇해져 요즘 부쩍 열심히다. 

 

오후 2시, 살림 일상 속 '내 일'을 하는 시간. 지난 주말 시작한 이번 곡 가사도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보니 슬슬 마음에 들어간다. 카페 주인 내외가 오늘분 딸기가 다 떨어졌다며 냉동실을 여닫는 걸 보면서 아까 열었던 우리집 냉장고 안이 생각난다. 불고기용 토시살 한팩, 쌈 채소 한 봉지, 양파 한 망태. 다진 마늘은 유통기한 얼마나 된지 확인 못했다. 가만, 파랑 고추도 필요하겠고.. 차돌박이 넣고 진하게 끓인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던 말도 생각나 핸드폰 메모에 추가로 적었다.

 

전기요금 내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곡 쓰다 저녁 메뉴 고민하다 전기요금 내고 있는 모양이 참 산만하다 생각도 들지만 주부 생활이 다 그렇지. 여기에 아이 둘이나 키우신 엄마는 참 정신없으셨겠다.

 

 

어릴적부터 사과 예쁘게 깎는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외갓집에 가서 고사리 손으로 사과를 잡고 쪼그려 앉은 내게, 할머니 친구분들은 '아유, 사내아이가 어쩜 과일을 이리 곱게 깎누'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그게 칭찬인진 모르겠지만 어르신들 눈엔 귀엽게 보이셨나보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걸 어필(?)했었던 것 같다. 뭘 잘하냐고 묻길래 퍼뜩 생각이 나지 않아 일단 뱉고 본 '어.. 일단 저는 사과를 되게 예쁘게 깎는데요.' 에 배시시 웃던 긴생머리 아가씨. 지금도 과일을 내올 때마다 종종 그 이야기가 나오곤 하는데 그때 상황이 뭔가 귀엽기도 하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다..ㅎ

 

 

 

 

입사 동기, 대학교 친구, 동네 형.. 사회 생활하는 남자들은 한 번쯤 생각해봤을법한 '살림하는 남자'의 꿈. 시곗바늘이 두자리를 가리킬 때까지 야근한 날이나 주말에도 업무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소주잔 앞 우리의 주제는 언제나 '회사 탈출' 이었으니깐. 맘 가는대로 지르는 뻥카가 아니라 자신있는 패가 들어왔을때 점잖게 툭 내려놓을 수 있는 형태로. 로또든,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바라는 건 모두 비현실적인 법이니 이쯤되면 백마 탄 공주님을 기다린다는 우스갯소리도 무리는 아닐거다.

 

"이렇게 살아야 하냐? 그냥 취집하고 싶다. 남자는 취가인가?"

"맞다. 그게 최고지."

"야, 다시 태어나야 해서 더 어렵다.. 그냥 회사 열심히 다니자."

"닥쳐, 포부 작은 놈아~ 머슴살이도 대감집에서 해야 한댔다."

 

능동적이고 독립적으로 개척하는 인생이 멋있게 보이던 시절이 있긴 했다. 그런데 막상 회사 다녀보니 의존적이니 수동적이니 소리 좀 듣더라도 능력껏 기대는 삶도 나쁘진 않겠단다. 전문직까진 아니더라도 빠지진 않는 직장에다 부족하진 않게 자란 녀석들이 더 자주 꺼내는 '취집' 드립은 일거리가 몰리는 월초와 월말에 유독 늘어난다. 회사에서 쭉쭉 올라가고픈 야망보단 내 삶 챙기며 여유 있게 살고픈 사람들의 바람이랄까?

 

명분보다 실리라며 주구장창 노래를 불러 놓곤, 또 꼭 그러고 싶진 않댄다. 현재 삶도 객관적으로 보면 나쁜 편이 아니니 굳이 지금 멈춰야 하냔다. 이건 뭐,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되면 되고 아님 말고' 주의의 나름 밥벌이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농담. 진담과의 경계는 방금 탄 소맥의 비율만큼이나 애매하긴 할 거다.

 

 

택한건지 간택받은건지 모르겠지만 살림남으로 사는 형이 있다. 결혼 전에도 꽤 잘 나간걸로 유명했기에 그가 전업 주부가 된건 참 의외였다. 오랜만에 모임에 나온 김 아티스트님 얼굴이 참 밝아졌다. 괜찮은 직장과 벌이가 뒷받침하는,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는 삶이 누구에게나 좋은 삶은 아니었단다. 인사팀 면담에서는 씨알도 안 먹혔던 '적성' 이야기는 아내에겐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고, 거창한 '셔터맨'까진 아니더라도 생계 걱정 없는 프리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됐다는 형. 가치와 역할 분담, 또 합의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알맞은 자리가 만들어지나보다.

 

출근의 개념이 없으니 확실히 단조로울 법한데, 워낙에 집돌이였던데다 취미마저 작곡이었다보니 별반 달라진 건 없는 일상이란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되려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참. 곡을 쓰는 일 자체가 원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기도 한데다 계약건이나 미팅도 잊을만하면 잡히니 딱 원하던 정도의 사회적 유대라며 웃었다. 덕분에 건강도 소득도 훨씬 늘어났다는데 환해보이는 얼굴엔 역시 이유가 있다.

 

놀기 위해 택한 길은 아니다. 여전히 일하는 건 좋은데, 달라진 건 하고 싶은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해도 괜찮아졌단 것. 누군가 내 몫까지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단건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지적 노동을 할 수 있단 점에서 참 좋은점. 가사 노동이 있긴 한데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건 회사서 보고 자료 만드는 것보단 훨씬 생산적인것 같다네? (이 부분에서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 좋은날 건조기에 돌린 이불 탁탁 털어 널고 커피 한 잔 들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없던 창의성도 피어나기도 하고.

 

오후 세시의 맥주는 쨍쨍한 햇볕만큼 톡 쏘았고 모두 나른해졌다. 주부 형아는 언젠가의 심리 설문에서 '남성적이나 여성성이 강하다'는 결과지를 받았단다. 유쾌하고 호방해보이는 모습 안엔 내향적이고 예민한 성향도 있던거였다. 친한 와중에서도 가끔씩 느껴지던 온도차 있는 성향이 정리되며 이제야 딱 맞는 옷을 입었다 싶다.

 

주말 출근한 형수님이 좋아하는 특식으로 저녁장을 본다며 먼저 들어간 형은 지금쯤 어슷 썰기한 파와 양파를 넣은 닭갈비를 내오고 있겠지. 낮에 우리를 만난 형과 회사 당직한 형수님이 서로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나누는새 같은 시간대 평행하던 두 하루도 만나게 될 거다. 여느 가정집과 사뭇 다르면서 같아 보이는, 사과 잘 깎는 남자와 경쟁PT 잘하는 여자가 살아가는 이야기.

 

그래서 주부 라이프는 만족스럽냐는 질문에 형은 대답했었다. '그럼~ 내가 사과를 기가 막히게 깎잖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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