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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96 아픔에 잠 못 드는 밤 업무는 내리고

매일 오후 경만 되면 문자 메시지가 오곤 한다. 여자친구면 좋겠다만 발신처는 근엄한 대괄호로 시작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인 오늘의 직장인 행동지침 중 하나는 '아프면 퇴근하기' 란다.

 

동기형에게 문자를 쓱 보여주며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그러면 스트레스 때문에라도 매일 퇴근해야 한단다..ㅎㅎ 낯빛이 안 좋아보이는 형은 최근 정말로 아팠다. 자는데 한기가 느껴져 내려놓은 전기 보일러 온도를 다시 높이고도 벌벌 떨면서 겨울 이불 속으로 들어갔단다. 정말 아프면 포근한 잠자리 속에서도 잘 수가 없다. 열과 추위와 땀이 범벅이 되어 너무 길어진 밤 중에도 다음 날 출근이 걱정됐다는 말을 들으며 회사원으로서 아팠던 첫날이 기억났다.

 

신입사원 4개월차 늦가을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와 다시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는 와중 멍한감이 느껴졌다. 식곤증으로 졸리는 것이겠느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셔츠에 니트까지 입었는데 몸이 으슬댔지만 할 일이 많아 계속 앉아 있었다. 오후 5시엔 열이 너무 많이 나 팀장님께 말씀드린후 길 건너 내과로 갔다. 독감이 유행 중이었기에 검사를 했고 확진 진단과 함께 타미플루를 처방받았다.

 

 

데친 시금치 마냥 축 쳐진 내게 의사 선생님은 집으로 가서 안정을 취하라셨다. 거기에 대고 이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 싶은데 일이 너무 많네요..ㅎㅎ" 사회 초년생의 단념하는 얼굴 앞에서 선생님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멈추셨다. 환자를 더 슬프게만 할 거란 걸 아셨는지 애매한 모양새로 닫혀 버린 입. 말하지 않아도 않아요. 찾아온 회사원이 비단 저뿐이었겠습니까?

 

병원 밖을 나서며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3통. 회사임이 짐작되는 앞 네자리 번호다. 전화를 거니 바로 받는다. 옆 팀 선배다.

 

"전화 왜 이제 받아요? 비용 품의 하나 다시 올려야겠더라?"

"네 선배님, 죄송합니다. 그거 제가 해서 오전에 올렸었습니다." 

"아, 추가 못한게 있어서 좀 다시 써 줘야겠는데.."

"네, 혹시 괜찮으면 내일 해도 될까요? 몸이 좀 안 좋아서 앞에 병원이거든요.."

"그럼 어떡해요? 여튼간에 오늘까지 마무리돼야 하는데??"

"..지금 들어가서 바로 하겠습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마스크 사이로 아까 의사 선생님 앞에서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온다. 아픈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만 진짜 정 없는 세상이다 싶으면서. 아니, 그럼 그간 먹은 초코파이는 다 뭐가 된데?

 

 

 

 

결국 다시 들어간 회사. 이번 달은 업체에서 사정상 조금 늦게 명세서를 보내게 됐다며 사정했었다. 막내들에게 대물림되는 비용 처리 업무가 밀린 사유라면 사유였다. 따져보면 모두 함께 사용한 사옥 관리비인데 아픈 사람을 굳이 굴려야하겠냐고, 신입사원다운 투정을 맘 속으로 부려보며 애써 릴렉스. 그치만 일하러 온 김에 보고하러 간 팀장님 자리에서 당황스러운 서운함을 느끼게 돼버렸다. 옆 팀마저 파티션 너머로 기웃거리게 만든 호통조의 목소리 때문에! '너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걸리면 어떡하냐'란 멘트에서 냉혹한 사회의 일면을 봤다. 절대 위로를 기대하면 안 되는 곳이자 친구가 아닌 일적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도.

 

생일을 맞은 친구들에게 홍삼을 선물하고 있다. 커피나 케익 보단 몸에 좋겠다싶어 보내게 됐고 요샌 받는 쪽도 제법 반기는 눈치다. 홍삼 기프티콘에 나란한 '센스 있다'는 답장이 조금 어색해보이지만 이런 것에 익숙해도 되는 자리에 안착했다. 회사생활이 모든 원인은 아니겠더라도 그 신분(?)을 유지하던 중에 나빠진 몸 상태에서 건강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됐달까?

 

면역력이 약한 편이라 운동과 건강식품 섭취를 꾸준히 하고 있다. 체온이 내려갔다 혹은 무리했다 싶으면 대번 목이 아프고 열까지 났기에 밤 한 번 새본적 없었다. 시험 기간에 늦은 시간까지 책을 보면서 콜록대던 중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건강 관리도 실력이다'. 지금 되뇌어봐도 냉정하게 들리지만 더 냉정한 이 사회를 살아나가기 위해선 명심해야 한다. 아프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곳이니깐.

 

학생 시절엔 아프면 나만 손해였다. 숙제가 밀리고 베껴 써야 할 강의 노트 분량도 늘어나고 공부해야 할 시험 범위도 밀린다. 고열에 잠 못 드는 밤, 비(B)라도 내리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정도만 감당하면 됐었는데. 

 

회사원이 되니 내가 아프면 내 옆 사람도 손해였다. 패널티가 커졌다. 월급 받고 일하는 처지이니 맡은 바를 해내야 하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고 (주는 돈 이상으로 일 시키는 경우가 잦은게 문제긴 한데) 아플 때도 예외는 아니다. "에고, 괜찮아요?ㅜㅜ 푹 쉬고 얼른 나아야지.. 그럼 그건 언제까지 가능하려나..?" 아픈 사람이 나일 경우엔 서운하게 들리겠으나 그게 내 카운터 파트너라면 이쪽에서도 나옴직한 말이다. 이해는 되나 인정은 되기 힘든 상황. 이해관계로 엮인 조직 생활 중임을 체감하게 되는, 이성이 감성을 현저히 넘어서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느 회사 사내 포털 메인에 멋진 글귀 하나가 걸렸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유명 컨설팅 업체에 의뢰한 보고서 발췌본이란다. '직원을 보호하기' 그 따뜻한 문장을 읽은 직원들은 정작 뚱했단다. 국제적으로 악화되는 상황 중에도 재택 근무란 없으니 언제 감염되도 이상할 것도 없는 출근길에 매일 오른다. 본인 건강은 회사 실적의 후순위에 위치했을 거라는 슬픈 체념이 둘러싼 곳에 어떤 위로를 전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저 아프지 마시란 말을 건냈다.

 

'갑'은 '을'의 건강에 관심이 적다. 옆의 동료도 날 신경써줄겨를이 없다. 챙김 받지 못하기에 아파선 안 된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행여 자주 아픈 천덕꾸러기라는 딱지까지 붙는다면 더 힘빠질테니. '직원'이 내일이니 '사람'이 소중하니 인자한 슬로건을 내세우는 회사들이 있다. 참말 뭣이 중허냐고 슬쩍 묻는다면 답변에 저 두 단어는 없을 거라 확신하는 '직원'과 '사람'이 그 안에 있고. 참말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분기나 반기에 한 번씩 별 이유도 없이 아픈 날이 있다. 잠도 푹 잤고 아침 밥도 잘 먹었는데 이마에 손을 대니 미열이 느껴지는 그런 평일. 오후 반차를 내고 집에 가면 좋겠다. 근데 지금 가면 일이 쌓인다. 약불이 중불이 될 타이밍엔 더 심해지기 전에 쉬는 게 좋겠다 싶다. 눈치 보는 입에서 나온 '몸이 안 좋아 반차를 좀 썼으면 합니다'의 메아리가 '내가 너 나이땐 며칠 밤 새도 끄떡없었는데'면 고민의 옷자락을 잡던 미안한 마음이 사라져버린다.

 

행여 조직에 누가 될까 싶던 선하고도 나약한 마음은 비누처럼 녹는다. 내 몸이 녹을 판이니깐. 사규에 따라 부여받은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를 드디어 가슴 쫙 펴고 요구하는 참이다. 못다한 일은 알아서 굴러가고 있으라 그래. 이미 홀딱 젖은 판에 밤새 업무 비 좀 맞지, 뭐.

 

아픔에 잠 못드는 밤 업무는 특히나 서럽게 내린다. 최대한 아프지 말기. 혹시 아프면 참지 말고 퇴근하기. 반나절 일이 쌓이는게 걱정돼 억지로 일하다가 일주일 분량이 통으로 쌓이는 비극은 막아야 할테니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