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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김사자 』

[신입사원김사자] Ep.93 행복한 나르시스트가 되겠어

누구나 그렇듯 매년 초면 신년 계획을 세우곤 한다. 지킬지 못 지킬지 알 수는 없지만 의례 챙기게 되는 연례 행사다. 비스듬한 자세로 보던 TV를 끄고 책상 앞에 앉았다. 새해 타종 소리를 들은지 보름이 지나고서야 한 해를 계획한다. 작년엔 2월이 꺾이고서야 시도했었고 어쩌다보니 제대로 세우지도 못했다. 포커 게임의 투 페어를 연상시키는 2020년, 이젠 만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서른 살을 맞이하며 올해는 첫 달에 꼭 계획표를 짜야겠다 싶었다.

 

메이저리거 오타니 쇼헤이의 성공 비결로 화제가 됐던 '만다라트(Mandal-Art)'를 참고하기로 했다. 가장 메인이 되는 중심 목표를 기준으로 여덟 개의 세부 목표를 잡고 다시 그마다의 액션 플랜을 설정하기. 정방형의 스토리 라인에서 뻗어지는 갈래는 생각보다 많았기에 구체적인 것들에서부터 추상적인 개념까지 쪼개는 과정이 반복됐다. 건강 관리, 자기 계발, 인간 관계, 회사 생활, 미래 준비.. 글과 선이 얽혀 거미줄처럼 촘촘해진 계획표는 우리 차장님이 좋아하는 '꽉 채운 느낌의 장표'를 연상케 했다.

 

7시 방향에는 <행복한 나르시스트가 되기>라는 목표가 적혔다. '나르키소스(Narcissus)' 이야기를 처음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누군가 '너, 얘랑 가까이 지내볼래?' 묻는다면 절로 손사레 쳤을법한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눈에도 그는 잘난 맛에 취해 남 마음에 상처를 주는 싸가지없는 놈, 샘물에 비친 제 모습에 반해 상사병으로 죽은 이상한 놈이었다.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인물에 거북함을 느꼈던 이유엔 어쩌면 그동안 보고 느낀 사회 분위기 영향도 있었지 싶다. 신도 아닌 주제에 자기애가 넘치는 나르키소스는 예절이란 이름으로 위계 질서를 강조하는 기조가 깔린 조직에선 '모난 돌'이었을 거다. 잘생긴 외모라는 특출난 재능은 때려오는 정을 한 대 더 부를 요소이기도 할 거고.

 

 

어쩌면 그가 요정 '에코'의 사랑을 거절한 건 되려 솔직하고 희망고문 않는 깔끔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방식이 좀 더 센스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의도치 않게 시원시원하고 소신있던 그의 이름을 본따 자기애를 지칭하는 단어 '나르시시즘(Narcissism)'도 만들어졌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출생과 동시에 죽음과 연관된 예언을 듣게 된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오래 살 수 있을 것' 이란 말을 들었다. 획일화와 복종이 미덕이던 사회 분위기가 자기 표현과 개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보는 눈이 많아 직접 망치를 대긴 겁내지만 '모난 놈'을 탐탁찮아 하는 시선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부족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말 잘 들으면 내 새끼, 안 맞으면 그 새끼인 이곳에선 튀면 튈수록 생활이 힘겨워진다. 어쩌면 나를 잊고 조직에 물드는 편이 안전히 또 편안히 근속할 수 있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나르키소스의 경우와 반대되는 말을 해주고 싶다.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오래 살 수 없을 것' 이라고.

 

 

 

 

 

심리 상담 센터에 방문한 어느 날이었다. 사우들과의 관계에 지치고 또 사회 생활의 쓴맛을 제대로 느끼고 있던 참에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심정으로 문을 두드렸다. 화이트 톤으로 정돈된 사무실에 들어가니 괜히 면담을 기다리는 말썽꾸러기 학생이 된듯한 기분. 어색해하던 내 앞에 상담사님은 따뜻한 차를 내어주셨다. 그리곤 사전에 작성했던 심리 설문지를 토대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방어적으로 풀어 놓던 말이 나오고 나오면서 저 안 쪽에 숨겨져 있던 진짜 내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랐다. 이렇게 할 말이 많았던지, 이리도 많은 걸 잃어버린 건지, 이정도로 내 모습을 잊고 산 것인지. 그렇게 궁금해하던 회사 생활을 하나 둘 알아가며 얻은 것이 셋, 놓친 것은 넷 정도였다. 

 

싸이콜로지는 싸이언스라고 훠궈집에서 소리치던 테드야, 그때 웃어서 미안. 주위 시선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믿었던 나는 주변을 꽤 많이 의식하고 있었다. 입방아에 대고 엿이나 까잡수라며 가운뎃 손가락을 흔쾌히 올린다고 생각했건만 돌고 도는 소문에 잠 못드는 밤도 잦았다. 소신과 개성을 택하겠지만 선택의 반작용이랄 수 있는 주위 평가에 마음이 불편한 건 내가 단지 A형이라설까? 

 

"본인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받는 평가에 마음 아파할 필요가 있을까요? 대신 친구나 가족들처럼 중요한 사람들에게 집중하세요. 그걸 위해 가장 1순위로 챙겨야 하는 건 아마 자기 자신이 아닐까 싶어요."

 

다음날 출근을 해서 PC를 켰다. 비밀번호를 치다 말고 그 아래 [암호 변경] 탭을 클릭했다. 새로운 비밀번호는, '내가 최고다'. 타자 치는 손가락이 오그라들어 주먹손으로 눌러야 할 순 있겠지만 그래도 최소 매일 한 번은 내가 최고라고 되뇌일 거다. 어제까지 나를 수많은 회사원 중 하나라고 각인시켰던 먼젓번 비밀번호는 '마케터' 였다. 

 

언제든지 또 누구든 대체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있다. 사원1, 마케터1의 일상을 살며 명함 밖 진짜 나는 누군지 잊어가기 시작한다. 더 큰 톱니바퀴에 기꺼이 고개를 숙인다. 위계 속 개인은 본인의 위치를 너무나 잘 안다. 그렇게 평가에 벌벌 떨고 평판에 목을 매며 소문에 가슴 아파하는 회사 내 시시포스(Sisyphus)의 형벌이 이어진다.

 

 

올해 목표 중 하나는 <행복한 나르시스트 되기>였다. 단순히 '남 눈치 보지 말자!', '나를 믿자!' 보다 뭔가 드라마틱한 타이틀을 잡고 싶었다. 말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맘이 먼저 단단해져야 한다. 그 시동을 거는 주문으로 새 비밀번호인 '내가 최고다'를 선택했고. 하루에 몇 번이고 내 손으로 써보는 최.고. 라는 글자에 발 맞춰, 회사에서도 씩씩하고 당찬 하루를 보내기 위한 다섯가지 액션 플랜을 설정했다.


  하나. 출근 전 거울 보고 웃기

  둘. 너무 골똘히 생각 말기

  셋. 기죽지 말기

  넷. 흘려들을 건 듣기도 전에 바로 흘리기

  다섯. '어쩌라고?' 마인드 갖기


나르시시즘은 마냥 긍정적인 단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긴하다. 자기 자신이 거의 모든 관심의 주체이자 대상인거니까. 그치만 예의가 없다거나 남에게 피해 주는 경우를 조심한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회사 내에서 나르시스트만큼 행복한 사람도 드물 것 같다.

 

모두가 주인공의 삶을 살 순 없다, 적어도 회사에선. 분주히 움직이고 있음에도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엑스트라1 신세가 대다수의 일상일거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참을성은 응원하지만, 고생 끝에 찾아올게 즐거울 낙(樂)일지 떨어질 낙(落)일지런진 잘 모르겠다. 그러니 민망해서 아껴둔 진심 혹은 소망을 올해부턴 오픈하는 건 어떨까?

난 사실 잘났다. 예쁘다. 잘생겼다. 힙하다. 섹시하다. 똑똑하다. 센스있다..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어떤 마음과 자세를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둘러싸는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오늘부론 좀 더 행복해지기로 했다. 행복한 나르시스트가 되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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