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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90 퇴근, 오늘이 세시간 남았습니다.

시곗바늘이 숫자 7을 가리키자 작업하던 손이 빨라진다. 가슴에 희망이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마라, 손은 기대보다 느리니깐. 퇴근하고픈 마음은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움직임 이상을 요구했고, 조바심만큼 늘어난 실수는 결국 1번 시트부터 다시 한번 확인케 했다. 오늘은 한시간만 야근하나 싶어 설렜는데.

 

비슷한 상황이 두 번 정도 있었던 것 같다. 퇴근 노래가 울려퍼지는 6시, 주 52시간 근무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자동 설정된듯한 사무실 조명 소등 때. 어수선한 그 타이밍에 야근러들은 심란해지고 슬픈 눈동자는 먼저 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따라다닌다.

 

눈치 보지 말고 퇴근하라는 팀장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의 일을 덜하면 내일은 더 힘들어지기에 그럴 수가 없다. 마무리하고 들어가 보라는 사수분을 두고 먼저 나오기도 좀 그렇다. 초과근무 수당도 주지 않는 경우, 퇴근 시간을 딱 지키는 게 경제적으론 합리적이겠지만 사회관계적 차원에선 함께 남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가 보다. 깊어지는 밤 의리와 공동체 정신으로 옹기종기 야근하는 아름다운 회사원들의 모습이 그렇게 연출되니깐.

 

 

월요일엔 한시간 반 정도 야근을 했다. 내일은 정시 퇴근해야지 싶었다. 그치만 두시간 정도 더 근무했다. 수요일과 목요일도 야근이었다. 한 번도 정시 퇴근을 못한만큼 금요일만은 진짜 꼭 반드시 칼퇴하겠다 다짐했지만 결국 야근행이었다는, 남 일 같지 않은 흔한 이야기!

 

함께 야근을 한 옆 사업부 동기형과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둘 다 빨리 집 가서 쉬고픈 마음 가득이다. 돌격하듯 문 열고 들어가 수영하듯 국물을 퍼먹었다. 술은 없다. 술 마시면 내일 더 피곤하니깐. 오늘도 고생했다며 서로 어깨 한 번 툭툭 치고 집으로 향한다. 외투를 벗어거니 긴장이 풀렸는지 급 피로가 몰려온다. 시계를 본다. 저녁 9시. 오늘이 세시간 남았습니다.

 

 

 

 

어바웃 퇴근.

직장인의 희망 출퇴근 시간인 나인 투 식스에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반영된 하루 총 근무시간은 10시간 24분이 된다. 일 평균 퇴근시간은 오후 8시 24분. 통근에 소요되는 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정도로 잡으면 잘 쳐줘도 9시경에야 집에 도착하는 셈이다. 달도 뜨고 별도 뜬 늦었다만 지금부턴 회사원이 아닌 온전한 나로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남은 세시간에서 씻고 옷 갈아 입는데 30분, 밥 먹는데 한시간, 웹툰이나 동영상 보면서 어수선하게 또 몇 분 보내고 있자면 이번에는 오후 11시 언저리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이다. 날이 고되서, 날이 피곤해서, 집에서라도 생각을 멈추고 멍하게 있어 보던 와중에 정신이 퍼뜩 든다. 한 것도 없는데 하루가 삼십분 남아 버렸습니다.

 

오늘도 너무 늦게 끝났다. 비로소 맞이한 하루 끝에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소리치는 직장인들. 사업부 실적 역신장을 막기 위해 고심하면서 정작 내 인생 역신장은 챙기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늦게나마 집에서는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 보고자 결심한다.

 

그렇게 탄 지하철이 집 근처 역에 도착했고 내리는 건 영락없이 소금기에 절은 파김치다. 느긋느긋 계단을 올라 길을 걷고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퇴근하면 ★★을 하고 만다!' 기세 좋게 마음먹을 땐 언제고 신발을 벗어 던지는 순간 이내 다 귀찮아진다.

 

퇴근시간과 남은 체력은 반비례한다. 눈동자엔 실핏줄이 드리웠고 뒷 목은 누가 돌이라도 얹어 놓은 건지 묵직하다. 요즘 유행하는 취미생활이니 자기계발이니 나도 한 번 해보려 했다만 나오는 건 연이은 하품뿐. 베개는 왜 또 저리 위험하게도 푹신해 보이는 건지. 자의반 타의반 회사에 갈아 넣고 나니 긁어모아 봐야 티끌 정도의 정신력과 체력만 남았다. 일단 재충전하고 보자며 기대어 귤 까먹고 TV 보는 새 정신이 희미해진다. 아, 안되는데, 퇴근 후엔 나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이튿날도 챗바퀴는 돌았다. 출근을 했고 일을 했다.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지만 아직 내 주위는 집에 갈 생각을 않는 것 같다. 사무실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석양을 신호로 어딘가로부터 긴 한숨이 들려온다. 누르는 건지 때려대는 건지 모를 키보드 자판 소리도 들린다. 빨리 마무리하고 퇴근하고 싶은데 엑셀은 자꾸만 멈추고 짜증만큼 커져버린 혼잣말이 계속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몸에 열이 오르고 입 안이 자꾸 마른다. 예민해지는 시간이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로 열심히 일했다. 드디어 나서려는 참에 보쌈에 소주나 한 잔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저녁 열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지만 헛헛한 것이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따라간다. 노곤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씻기만하고 드러누우니 또다시 허탈하다. 회사 출근 말곤 한 게 없는 오늘이었다. 과거 외거노비 정도가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어느 금요일 저녁 간만에 친구들과 고기나 굽기로 했었다. 퇴근 시간을 고려해서 저녁 일곱시 반에 만나기로 했는데 애들 반이 약속 시간에 늦었다. 2차가 끝나갈 때쯤 도착한 형은 2주 간 내리 야근 했단다. 낯빛이 꺼멓게 타들어간 삼겹살 색과 비슷했다.

 

작년에 실적이 나빴다면 올해는 보고나 개선 작업과 같은 업무가 더해진다. 야근을 하게 된다. 작년에 실적이 괜찮았다면 올해의 목표는 훨씬 높아져서 일이 많아진다. 야근을 하게 된다. 회사의 오늘은 늘 위태롭단다. 뉴스에선 역대급 실적이라는데 내부 공지에선 어렵고 위기란 이야기뿐이다. 다른 회사 다니는 거? 과거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은 자발적인 무급 야근이었다는 외국 기사를 읽은 적 있다. '회사가 어려우면 당연히 야근도 할 수 있어야지' 기조에 익숙한 그 세대가 이제는 이끄는 위치에 올라와 있다. 위기다.

 

면학 분위기가 잘 형성된 학교에선 보통 학생도 열심히 공부하게 되듯 야근도 주변 분위기가 중요하단다. 처음엔 기를 쓰고 초과 근무를 피하려던 사람도 습관적 야근 분위기에서 생활하다 보면 점점 거기에 젖어들게 된다.

 

퇴근 후 독서 모임에도 참석해보고 싶고 학원도 다녀보고 싶지만 시간대들이 회사에서 야근하고 있을 때더라. 정시 퇴근은 어려운 걸 아니 애초에 느즈막히 예약해둔 미용실마저 결국 갈 수 없게 됐을 땐, 이렇게 사는게 맞는 건가 싶다. 처음에는 가장자리서 쭈뼛대던 야근이란 놈이 이제는 대놓고 하루를 집어삼키려 한다.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오고 있다. 빼앗긴 저녁 시간에도 봄은 올까? 오늘도 퇴근 종이 울렸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건너편 누나는 오전 7시 같은 오후 7시를 보냈을 거고 옆 팀 형은 아침 8시 같은 저녁 8시를 맞이하려나 보다. 퇴근하고도 감히 뭔갈 할 수 없는 그녀의 일상과 감히 퇴근할 수 없는 그의 하루에 관한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