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앞으로 다가온 면접 준비를 위해 스터디를 하던 4년 전이었다. 각자 모아온 자료를 토대로 열띤 토의를 하고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꽁트 같은 모의 면접도 하길 몇 일째, 오늘도 고생했다며 인사하고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스터디 카페에 들어섰을 땐 낮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저녁 7시.
걷다 도착한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눈이 살짝 시려웠다. 강남대로와 서초대로의 교차점인 강남역 부근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회사촌이자 번화가다. 그 날 따라 밤은 유난히 깜깜했고 우뚝 솟은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들은 유난히 밝았다. 모닥불 앞 불멍 때리듯이 서 있는 내 주위로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느 정도 원하는 수준의 플랙스(Flex) 할 능력되는 저 시크한 표정은 보통의 대학생들의 졸업 후 지향점일까나?
잠깐 내려온 눈이 다시 위를 향한다. 칸칸이서 흘러나오는 빛에 눈이 부신건지 아픈건지, 실눈 뜨면서도 자꾸만 올려다보게 되는 저 곳.
'저 많은 자리 중에서 내 자리는 있으려나?'
4년 후 어느 퇴근날 샛강다리 위였다. 오늘도 고생했다고 스스로 위로를 하며 여의도를 벗어나던 참, 문득 올려다본 건너편 아파트 불빛이 너무 밝다 싶었다. 집들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형성된 빛무리가 시야를 한참 넘어섰다. 별 하나 없는 어두운 서울 하늘엔 수많은 거실 불이 대신 빛난다. 많고 멀다는 점에서 그 둘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이 많은 집 중에서 내 집도 있으려나?'
취직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소위 말하는 대기업 관문을 통과하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사원증을 걸고 새로운 고민과 맞닥뜨렸다. 밀푀유 마냥 켜켜이 쌓인 걱정거리도 한몫한다. 취업 한 놈만 패면 됐었는데 이젠 동시에 몇이나 상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한 학번 위 선배 중에 구직 활동에 참 열심히던 형이 있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그는 장사하면 잘 할 것 같다는 주변의 말에 언제나 이렇게 화답하곤 했다.
"얼른 대기업 취업해서 효도 해야지~!"
우리는 취업을 했고 효자가 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나를 하니 다음 순서가 줄줄이더라. 열심히 모아 내 집 마련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효도에, 결혼, 손주를 안겨 드리는 효도까지. 고향에 내려갈 때면 농담처럼 듣게 되는 '다음 효도 리스트'를 역시나 농담조로 받아내곤 했다만 서른 줄에 접어들면서부턴 그게 꽤나 묵직하게 느껴진다.
합격자 발표가 채용 페이지에 공지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덤덤히 인터넷 창을 열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Log In] 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이 바뀌는 타이밍에 무서운 웹툰을 볼 때처럼 핸드폰을 비스듬히 기울여 들었다. 액정 보호 필름의 두께가 보일 정도에서 조금씩 각도를 올렸고, 알록달록 폭죽 그림이 슬쩍 보일 때야 합격 통보와 정식으로 마주했다. '축하합니다!' 이 다섯 글자를 만났으니 다 끝난 거라고, 예비 신입사원은 믿었었다.
멋지고 역동적인 삶을 사는 직장인이 됐다. 아니, 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학교-도서관-집을 오가던 심심한 루틴을 드디어 졸업했다 싶었더니 일상은 회사-집으로 되려 간소해졌다. 보상 심리로 놀아 버린 주말, 그 후에 다시 이어지는 챗바퀴 위 밋밋한 하루. 상사에게 깨질 때가 가장 다이나믹하지, 아마?
꿈과 환상을 가지고 취준생 생활을 보냈고 취업이 확정되고서는 기대와 희망을 품었다. 다가올 회사 생활을 열정으로 그렸던 연수원에서의 나날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도착한 현업에서, 나는 이상도 아닌 예상과 현실 사이 괴리에 혼란스러워하던 전형적인 1년 차 신입사원이었다.
사회 생활 몇 년만에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나이가 저만치서 보이기 시작했다. 연차가 늘수록 고민도 쌓여간다. 커리어를 계속 밀고 나가도 될지 직무를 바꿔 봐야 될지. 혹은 이 회사에서 승부를 봐야할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봐야 할지. 생활에 대한 걱정을 넘어 생존을 위한 걱정을 해야 하는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것을 담보로 그럭저럭 고개는 끄덕여지는 경력과 그냥저냥 먹곤 사는 생활을 얻었다. 위험 감수를 두려워 않던 눈동자는 안정을 더 빨리 쫓기 시작했고 쥐뿔 없는 인생에도 지킬 것이 늘어났다. 모르는 새 이만치 먹어버린 나이는 다시 용기를 깎아 먹나 보다.
4년 전 나의 꿈은 출근이었는데, 4년 뒤 나의 꿈은 퇴근이 됐다. 한 덩이 주먹밥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알람은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걸 먹어야 하나' 싶다가도 손에 쥔 게 그 뿐이니 먹는다. 사원증을 매고 있는 한 계속 그럴거다. 이 정도의 하루에 안도하는 마음과 이 정도의 일상에 안주하기 싫은 맘 사이 영원한 싸움이겠지.
그렇게 들어선 취업길에서 칭찬에 힘입어 한 계단 발자국을 찍고, 기도와 응원에 보답하고자 다시 하나를 오른다. 가장 경사가 낮은 코스를 선택했으니 여기서만 더 힘을 내면 마지막 문을 만나리라는 기대와 함께. 숨 가쁘게 열어 젖힌 그 뒤엔 또 다시 복도가 있었고 더 크고 무거워 보이는 문이 끝에 보인다.
"취준 때는 왜 그리 열심히였을까? 뭘 위해서 회사 들어오고 싶었을까? 왜 직장인이 되고 싶었을까? .. 그때 우린 미쳤었지.."
뭣도 모르고 대기업 예찬했던 적이 있었다. 취업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회사만 들어가면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4년 전 강남역 앞에서 본 직장인들의 시크한 표정은 사실 슬픈 얼굴이었던 것 같다. 지침과 고됨이 한껏 묻어나는. 역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던 행렬은 쫓기는 피난민 같았고.
야근하고 나온 퇴근길엔 비가 추적였고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모범 택시들만 보여서 몇 초 고민하다가 그냥 타기로 했다. 종일 고생했으니 저정도는 누려도 되겠지. 주말엔 소고기에 좋은 와인을 곁들여야겠다. 생각보다 돌아오는 것도, 누릴 수 있는 것도 적은게 직장인의 일상. 그래선지 원초적인 보상을 떠올릴 때가 하루 중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니, 이렇게 별 것 아니지만 나름의 셀프 선물을 해가며 살아가는 거다.
택시 타러 뛰어가다 본관 앞 청동상과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걸터 앉아 차분히 생각하는 에이스 직장인의 모습을 따라 만든 듯한 작품명은 <상념>. 그 날 따라 급히 움직였기 때문이었을지 내리는 비 때문이었을지는 몰라도 쪼그려 앉아 우는 듯 처량해 보이는 모습에 자꾸만 뒤돌아보게 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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