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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85 두번째 신입사원

'올해는 정말 빠르게 지나간 한 해였습니다. 가을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지난 1년을 복기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습니다.'

 

위의 문장으로 2019년 연말 본인평가의 마무리 페이지인 '고충 사항' 란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조직 생활 중의 어려움이나 하고 싶은 말을 적으라는 명목의 항목. 사내에서 뱉은 말은 어떠한 형태로든 소문이 나게 마련이니 말 못할 고충은 깊이 묻어두고, 모두가 다함께 발전하길 바라는 건설적인 바람으로 화답해본다.

 

올해 초 팀을 옮겨와 연초 고충사항을 써낼 때였다. 시스템 상 반드시 작성하게 되어 있어 직전 팀 스타일대로 '없습니다' 적어냈다. 그렇게 찾아온 연말에서는 특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시작을 연 문장처럼 정말로 여의도 가로수가 울긋불긋해질 때가 되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고충 사항란을 다 채우고 제출 버튼을 누르며 한 해가 지나긴 했구나 싶었다.

 

두 손 가득 짐 싸들고 내려간 대구에서의 신입사원 시절을 지나 본사에서 시작하게 된 건 두번째 신입사원 생활이었다. 2년 6개월의 지방근무도 쉽진 않았지만 다시 겪게 된 신입사원으로서의 1년의 시간은 특히나 더디게 흘러 갔다.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 사뭇 다른 공기에서 숨 쉬기, 신입 아닌 신입으로서의 애매한 위치는 익숙함에서 탈피하기 위해 택한 새로움의 대가였다. 후배가 둘이나 있던 화려한? 과거를 흘려보내고 다시 막내 명찰을 달았다. 염려 섞인 기대감이 두번째 신입사원 앞에 놓였다.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왠 청년이 회사 주차장에서 나온다. 떠가는 조각 구름도 올려다 보며 느긋한 발걸음으로 출입문 입구에 도착해서야 주머니에서 사원증을 꺼낸다. 심히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입사때 모습이 기억난다.

 

구김 없는 정장에 각 잡힌 머릿칼, 조교의 '왼발! 왼발!' 소리에 맞춘 듯한 걸음걸이로 같은 문을 통과했던 때가 있었다. 입지 않아도 된대도 굳이 착용하던 정장은 꼬리가 퇴화했듯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신축성 좋은 맨투맨과 통풍 잘되는 운동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다시 본사 발령을 받은 그의 몸에는 와이셔츠며 구두가 다시 돋아나 있다. 오랜만에 입는 옷이 불편해선지 신입으로서의 간만의 감정 때문이었는진 몰라도 애꿎은 손목 단추를 만지작 댄다. 패기와 포부, 한 두 번만 봤을 경우엔 귀여워 보일 어리바리함은 두번째 신입사원에게선 여러모로 애매하게 느껴진다.

 

2년 6개월 간의 기존 팀 생활에 작별을 고하고 이동했다. 본부 간의 이동인지라 조직 분위기부터 많이 다르다.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한다. 일하는 방식과 업무 자체도 다시 싹 배워야 한다. 새 마음 새 뜻으로 뭔가 해보겠다는 설렘 뒤엔 염려와 걱정도 슬그머니 자리했으니, '새로움' 을 향한 닻을 올리게 되며 여러 파도를 맞딱뜨려야만 했다.

 

'넵' 몬스터가 됐다. 

1년 간 가장 많이 한 말이 '넵!', '네, 알겠습니다!' 일거다. 모르니까 일단 묻고 듣고 적고 배워야 한다. 의문이나 내 생각을 넣어 보는 건 그 이후다. 팀원들의 개인 일정을 취합해 스케줄 표에 반영해 다시 공유를 한다. 휴가 계획이 바꼈다고 수정해 달란다. '넵!' 하고 다시 파일을 클릭하고 있으면 다시 한번 신입사원이 되었음을 체감한다.

 

'버틴다' 는 단어의 무거움을 체감했다.

박힌 돌이 준다고 생각하는 눈치의 정도와 굴러 들어온 돌이 느끼게 되는 텃세는 사회 생활의 대표적인 엇박자 공식이란다. 함께 이동한 옆 팀 선배는 강한 놈이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놈이 강한 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퇴사했다. 언제쯤 팀에 기여할 수 있냔 돌덩이가 자꾸만 등에 실린다. 넘어질 듯 기우뚱대길 여러번이지만 근력이 조금씩 강해지길 바라면서 버틴다. 

 

'Under the Sea' 로부터 다시 올라와야만 했다.

모래를 박차고 위로 위로 헤엄쳐 올라오다 다시 발바닥이 닿았다. 막내라는 추를 허리에 묶은 채로 차근차근 새로이 나아가야 했다. 좀 올라왔다 싶으면 정어리 떼가 앞을 가로막고 심해어가 바짓단을 잡으니 멈칫하면 다시 바닥행이다. 알고 있던 걸 잊고 새로 배워 나가는 게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힘들단다. 열심히 헤엄치다가도 이따금씩 옛 조직 기억에 잠겼다가 떨어지는 얼차려?를 매개로 현실 복귀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새로움' 이렸다.

힘든 조직이라는 주변 의견에도 이동을 결심한 이유는 새로움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기도 했다. 그리고 변화는 근무지와 담당 업무를 비롯한 주위 환경에서부터 시작됐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다시 그 주변을 달이 돌 듯 팀을 축으로 형성된 새로운 부서들과의 관계도 신선했다. 가끔 확 튀는 세기에 두 눈이 번쩍 뜨일 때도 있다만 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인한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더라.

 

 

연차로는 막내가 아니지만 막내 사원의 자세가 필요한 상황에 놓이는 건 조직 이동자들의 숙명이다. 생판 신입사원은 아니니 간단한 실무라도 얼른 맡아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은 금방 현실이 된다. 모르는 것에 비해 교육 받을 시간은 줄어든 상황에도 직면한다. 두번째 신입이니만큼 적응에 걸리는 시간도 두 배는 빨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굳이 입 밖에 내진 않는 모두의 생각. 눈치껏 배우고 일하다 보니 두번째 신입사원의 시계는 유독 빠르게 흘러간 듯하다. 어느정도 적응했다 싶었던 어느날 인사 이동 소문을 접했다.

 

매해 12월이면 어김 없이 등장하는 인사 이동 이야기는 모두의 관심사다. 우리 팀에서도 몇 명의 거취가 입소문에 올랐는데 내 이름도 있었다. '이렇다고 하더라', '아니다, 저렇댄다' 자꾸만 들려오는 소문에 겉으론 별 내색하지 않았다만, 결국엔 조직 이동을 하게 됐다. 할 말이 많았지만 그냥 접어 뒀다.

 

그렇게 복도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책상에 쌓인 먼지를 닦아 내며 새로운 자리에 조금씩 정을 붙여 본다. 다시 밟은 바닥에서 준비운동부터 씩씩하게 해보는 연말이다. 두번이나 해봤으니까 이번엔 더 빠르게 또 제대로 헤엄쳐 오를 수 있을거라는, 세번째 신입사원 이야기가 막 시작되는 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