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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83 헛돈의 심리학

출근 시간이었다. 함께 엘레베이터 앞에 줄 서 있던 선배가 어디다 꾸벅 인사를 한다. 모르는 분이었지만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프라이데이에 뭐 좀 사셨어요?"

"아뇨, 뭐 쓸데없는 것들 몇 개 정도?"

"원래 쇼핑이 쓸데없는 거 이것저것 집어 담는거죠 뭐 ㅎㅎ"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내 입에서도 순간적으로 어떤 말이 튀어 나왔다.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 Giving Day) 이틑날은 '블랙 프라이데이' 라고 불리는 북미 최대의 쇼핑일이다. 거의 모든 제품과 브랜드들이 이 기간을 최성수기로 보고 연 최고의 할인율을 책정한다.

땡스기빙데이의 기원은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생존을 위해 시작한 농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데 있지만, 다음날 누구보다 빠르게 물건을 사기 위해 칠면조로 두둑이 배를 채우는 전야제라는 우스개 소리가 돌기도 했다. 아무튼 인터넷의 발달로 블랙 프라이데이는 한국인들에게도 어느새 익숙한 쇼핑일이 됐으니, 상업 업체들은 대목을 노리며 또 소비자들은 득템을 노리면서 절묘하게 수요와 공급이 폭등하는 그런 날이다.

 

 

연초보다 가까워진 사수분은 선배 직장인이자 형으로서의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다. 농담 섞인 이야기 사이 '헛돈'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했었다. 쓸데없이 술 마시며 노는 헛돈, 쓸데없이 이성을 만나며 쓰는 헛돈, 쓸데없이 아는 (여자) 후배들 밥 사주는 헛돈, 쓸데없이 갖가지 물건을 사는 헛돈까지, 경험에서 우러나왔음직한 삶의 지혜?를 나눠주심에 일단 감사를 표하는 바다 ㅜㅜ 저라도 끝까지 잘 살아남겠습니다.. 

 

보람 없이 헛되이 돈을 썼을 때, '헛돈 썼다' 는 평을 듣는데, 대부분의 경우 돈을 지출한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보람이란 감정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세간의 평일까? 실제로 구매한 내 마음일까? 모두가 'YES 헛돈' 이랄 때 물건 산 당사자는 'NO' 라고 한다면, 그건 헛돈 쓴 거라고 해야 할지, 아닌 거라고 봐야 할지 고민스럽다.

 

블랙 프라이데이 쇼핑 이야기가 한창이었던 엘레베이터 줄 앞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맞아, 쓸데없는 걸 싸게 사야 기분 좋죠. 쓸데있는 건 제 값 내고 사도 덜 아까우니까요."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에 실제 판매 트렌드를 조사하러 미국 출장을 다녀오게 됐다. 십 년 전만 해도 엄청난 쇼핑 인파에 사람이 깔린다는 이야기도 나오곤 했는데, 지금은 매장 앞에 30명 미만의 고객들만 서 있다. 온라인 몰 주문이 늘어나게 되며 오프라인 매장 내방객은 감소 추세라더니 확실히 그렇긴 한가 보다. 

소비 동향을 분석해보니 예년보다 매출은 증가했다는 걸 보면 또다른 의미의 보이지 않는 손이 늘어난 셈이다. 세계적으로 경기가 어렵다는 말, 정말 맞는 거야?

 

가게 문 앞에서 길게 늘어진 줄은, 온라인 홈페이지에 접속해 대기하는 수많은 눈빛들은, 오픈하자마자 카트에 일단 담고 본다. 사야 할 물품을 미리 정해두고 그것만 쏙쏙 골라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꽂히는 걸 잡는다.

'바빠 죽겠는데 혹은 귀찮은데 그냥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사고, 없으면 다른거 사고 그러는 거지..'

 

살 품목과 금액을 두루뭉실하게 잡아 놓다보니 장바구니에서 다시 빼고 넣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리고 언제나 결제액은 예산을 초과한다. 카드 결제일이 다가오면서 슬슬 진짜 내 돈이 나간다는 사실이 체감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성격에 따라 세가지 반응이 나온다.

'감당도 못하면서 왜 샀을까' 자책하는 현실 순응형,

'인플레이션때문에 현금 가치는 계속 떨어질 거라 물건 사는 게 이득' 이라는 정신 승리형,

'통장에 얼마 있는지도 모르겠다' 는 무관심형까지.

 

모임비나 술 값 지출엔 관대한 사람이 있다. 옷이 날개란 이유로 의류 구매를 사랑하는 패션 피플도 있다. 누구는 백만원이 훌쩍 넘는 학원엘 등록하고 몇 십만원 짜리 공연 티켓을 척척 결제하기도 한다. 거액의 인센티브를 수령하고서도 당장의 구매 욕구를 억누르는 저축왕 또한 있다. 본인만의 만족감으로 대변될 수 있을 효용 극대화를 위해 최적화된 소비를 하는 합리적인 개인의 모습이다.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에 아울렛 가봐야 살 게 없다는 내 말에 대한 친구A의 답변은,

"살게 왜 없어.. 사려면 다 있지.. 나였으면 돈 백은 그냥 썼을텐데.."

 

세계를 강타한 이어폰의 신제품이 나왔다는 소식에 대한 친구B의 의견은,

"사야 한다! 좋은 건 사야만 한다! 사라! 바로 사러 가자!"

 

구매 의사결정 패턴은 각자의 관점이나 중시하는 가치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기 마련이다.

누군가 헛돈을 썼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냥 서로가 우선 순위가 다를 뿐임을 이해하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이뤄지는 모든 소비는 틀린 거라곤 할 순 없을거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는 속담처럼 대부분이 홀대하는 것조차 어느 한 명은 찾게 되기 마련이니깐. 그러니 헛돈은 상대적인 개념일거다.

 

헛돈. 속이 헛헛해 보이는 이름 치고는 상당히 어감이 귀엽다. 군것질을 조금만 하려고 했는데 실패해버린 꼬마애가 짓는 울상 같다랄까? 우쭈쭈.. 그래도 사먹을 때는 좋았을테니 울지 말고 집에 가렴..

 

결국 돈은 행복의 재료라는 것에 존재의 의미를 두어 본다. 네가 하루하루 피땀 흘려 버는 돈은 다른 사람 말고 너한테 가장 큰 기쁨을 줄 방향으로 써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남들이 보기엔 허투루 쓰는 돈일망정 네가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건 가장 현명한 소비일 거라는 쪽에 슬쩍 힘을 더 실어 준다.

 

사귀는 사이는 아닌 아는 동생과 주말에 보기로 했다며 좋아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언젠가 잔을 기울인 적 있다. 테이블에 사수 선배가 있었다면 한 잔 따라주며 분명히 한마디 해줬을 거다. 그리고 그 말에는 나도 동감하는 바다 ^_^/

 

"헛돈 쓰지 말라니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