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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84 누가 해외 출장 부럽다 소릴 내었는가

"엿됐네?? 출장 다녀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 간다.." 

 

먼저 출장 다녀온 동기들의 후기가 귓가에 맴도는 순간 나의 첫 출장은 과연 어떨지 궁금했다.

품의를 시스템에 업로드 할 때만 해도 보통의 업무 같던 출장은 '0월 0일 ○○행 항공권 발급 및 ▲▲ 호텔 예약이 완료되었다' 는 여행사 연락을 받을 때야 정말로 실감난다. 준비한 자료는 어느정도 완성됐는지, 가서 좀 더 챙길만한 사항은 없을지, 혹시 잊은 건 없을지를 챙겨보는 며칠 간의 일상 후 드디어 인천 공항으로 향한다.

 

"그럼 ○○에 가는 거야~? 너무 좋겠다 ㅜㅜ"

 

출장 가게 되었다니 주변에선 '좋겠다' 라는 말부터 나온다. 비속어로 서두를 열고 경기로 이어져서 한숨으로 마무리되는 해외 사업부 동기들의 반응과는 180도 다르다. 해외 출장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려주니 동기들의 힘 빠진 두 눈이 급 동그래진다. 뭔 소리냐며, 중구난방 지역방송으로 시끄러운 와중 제일 안쪽에서 조용히 커피만 마시던 중남미 지역 담당 형이 드라마 캐릭터처럼 근엄하게 한마디 했다.

 

"누가 해외 출장 부럽단 소리를 내었는가? 누가 그런 소리를 내었어?!!!"

 

 

가족과 친구들은 비행기 타는 자체가 일단 부럽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새로운 장소에서 쌓는 경험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다 싶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일수록, 또 유명한 도시일수록 터져 나오는 감탄사는 커져 가고 동시에 그걸 바라보는 출장인들의 한숨 소리도 덩달아 높아진다. 동경의 목소리를 솎아 보면 '새로움, 낯섬, 설렘, 견문, 비행, 외국' 정도로 정리 되니, 여행과 출장은 정말 한 끗 차이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출장은.. 다른 행성에 가는 느낌이랄까? 목성을 밖에서 보면 엄청 이쁜데 안에 들어가면 바로 뒤지잖아..^^"

 

방금 우주영화를 보고 왔다는 동기형의 이런 코멘트를 듣자면, 해외 출장에 대한 부러운 시선은 실제 출장자들에겐 눈에 마구니가 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셈이다.

 

햇병아리 해외 영업인으로서 번쩍이는 마천루 속 불빛과 고풍스런 성곽에 가려진 그들이 말하지 않던 해외 출장, 그 뒷 이야기를 조심스레 해보려 한다..!

 

 

 

 

이번에 출장 가면 또 뭘해서 들어와야 할지 고민이라며 한숨 쉬는 동기 어깨를 격려차 툭툭 치는 와중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해외 출장 가서 너무 좋겠다' 는 메시지가 언뜻 보인다.

 

기린을 보지 못한 사람이 실제보다 더 크고 거대한 기린을 상상하는 만큼, 열대 우림 원주민에게 세상 무엇보다 차갑고 신비한 게 흰 눈인것처럼,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동경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출장을 다니지 않는 직장인들에게도 출장의 긍정적인 부분이 우선 부각되어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야무진 착각을 부르는 뉴욕 JFK 행 티켓 아래 빙산의 밑동은 사실 이렇다. 

 

출국/입국일이 다가올수록 스멀대는 부담감

누누히 말하지만 놀러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는 거다. 한국을 나갈 때는 마음대로지만 들어올 때는 빈손 사절이란다. 출장이란 명목 하에 나간만큼 어떤 형태로든 결과물을 들고 와야 하는데, '놀았다' 는 소리 듣지 않을 수준의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이랄까? 그래서 대개 출발 전에 뭘 해올지 어느정도 틀을 잡아 둔다는데, 경험이 적은 병아리 사원일수록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출발 전 그리고 복귀 며칠 전에야 밤샘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출장지에서의 시차 및 환경 적응

평균 15시간의 장거리 비행에서 체력이 1차적으로 소진되고 한국과의 시차로 인한 피로가 쌓여간다. 자기 베게를 베야 잠을 잔다는 사람들은 잠자리가 변경된 와중에 푹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빵으로 가득한 호텔 조식과 식당 음식을 입에 넣다보면 집밥이 그리워지고 속은 부대껴 오니 입맛이 뚝 떨어지는 날이 잦다.

'그래도 퇴근 시간 이후엔 관광도 하고 좋지 않느냐' 는 질문엔, '본사가 있는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저녁에도 현지 사무실에서 업무를 봐야만 했다' 는 동기의 한 섞인 말로 대답코자 한다^^ 짬이 쌓이고 연차가 쌓이고 노련해진 선배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 늦게까지 일하고 저녁엔 또 아저씨들과 술 한 잔하고 들어오면 자정이 가까워 오니 출장지의 낭만을 느끼긴 커녕 피곤한 매일이다.

 

출장 복귀후 다시 해줘야 하는 원래 일상에의 적응 

1~2주의 출장 이후 돌아온 한국에선 시차가 다시 바뀐다. 도착해서 호텔도 들리지 못하고, 혹은 다음날 곧바로 현지 법인으로 향해야 하는 출장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내 복귀일 다음날엔 출근을 해야 하니 컨디션 회복이 더뎌진다. 오후 경엔 졸음이 밀려오고 새벽엔 눈이 떠지는 시차 적응 기간에는 규칙적으로 가던 헬스장 마저 갈 생각이 없어진다. 운동으로 간신히 붙잡았던 체력도 연쇄적으로 떨어지니, "출장 자주 다니면 몸 다 망쳐~" 말하던 선배들 말이 이해가 가던 첫 출장이었다.

 

해외 사업부서로 넘어온 지난 1년 간 미국과 캐나다를 각 한번씩 다녀왔다. 365일 중 고작 20일 정도 밖에 출장을 경험하지 못한 셈인데, 해수면 밑 빙산 아래라고 여겼던 부분이 아직도 그 일각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먼저 출장을 다녀온 동기는 이런 말을 했다.

"해외 출장 가봐야 일하는 장소만 변하는 것 뿐이고 달라지는 것 하나 없어."

 

첫 출장을 준비하던 와중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친구에게 저 말을 전해주니 이렇게 말하더라.

"그래도 맨날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보다는 출장지 가서 일하는 게 차라리 안 낫나?"

  

 

예전 국내 영업을 담당할 때도 일주일에 한 두번씩 지방 소도시로 출장을 다녀오곤 했다. 편도에 2시간 거리라 왕복하면 4시간, 하루 근무시간을 8시간이라고 치면 실제 업무시간은 반 밖에 없는 셈이다. 행여 업무 소요시간이 늘어난다거나 예기치 않는 변수가 생기게 되면 퇴근이 늦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그러다보니 출장지에 도착하면 빠르게 업무만 쳐낸 후 돌아오는 고속도로에 오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역시나 출장지로 향한 어느 봄날이었다. 개화 시즌에 걸쳐 도로가 상당히 막혔고, 늘어나는 도착 시간을 보며 짜증이 났다. 얼른 일하고 집 가야 하는데.. 시한 폭탄을 운송하는 것처럼 도착한 경주 가로수엔 벚꽃이 흐드러져 있었고 의도치 않게 꽃비 속 드라이브를 하게 됐다. 한시간 정도 지연된 일정에 평소 같으면 식사도 걸렀을테지만 되려 운전 속도를 낮추고 흩날리는 분홍색 꽃잎을 자꾸 흘깃댔다.

관광객들 틈에 끼어 있다보니 느긋해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왠일로 거리가 좀 있는 식당까지 가서 밥도 먹고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까지 한 잔 했다.

 

그 이후로 출장의 패턴이 달라졌다. 부모님 드릴 경주빵 봉지를 달랑대며 혼자 고분 사이를 걸은 황리단길의 추억부터 거래처 분에게 그 지역 맛집을 쭉 읊어 달랬던 기억까지. 이상하게 그리운 오래된 미국 주택 냄새를 영천의 어느 목조 카페에서 맡은 적도 있었다.

 

그해 봄날,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어르신들의 얼굴엔 함박 웃음이 꽃보다 더 활짝 피어 있었고, 자동차 룸밀러에 비친 사회초년생의 얼굴엔 피곤과 조급함 섞인 그늘이 드리웠었다. 일적인 부담감만으로 출장을 둘러싸 삶이 너무 피폐해지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던 것 같다.

 

일을 하러 가는 걸 출장이라고 하고, 쉬거나 놀러 가는 걸 여행이라고 부른다. 가방을 싸면서 부담감으로 가슴이 간질 거릴 때를 출장 준비한다고 하고, 설레서 가슴이 간지러운 순간이 여행 준비할 때다.

 

그리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출장을 여행보다 더 자주 가게 되는 직장인들이다. 나름의 재미와 의미를 찾아가는 마음의 여정 속에서야 출장은 나름의 특별한 여행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관광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주변의 환경이 변하니, 평소와 다른 어떤 인사이트를 얻을 확률도 또 예기치 않은 재미난 사건을 경험할 순간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을까?

 

휴가지로 출발할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출장길에 오른 당신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질 수 있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