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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86 진작 좀 불러주지 그랬어요, 우리 애라고

20층에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왔다.

7층에서 로비로 내려오는 엘레베이터에서 동기 형이 내렸다.

각자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같은 지역 사옥 같은 층에서 생활하던 우리는 작년 초 함께 본사로 발령 받았다. 부서가 달라 형은 7층으로 나는 20층으로 출근하지만 같은 건물에 있으니 자주 얼굴 볼 수 있겠다며 손뼉 쳤었다. 그리고 사내에서 마주친 적이 손에 꼽는 1년을 보냈다. 열 손가락을 접어도 모자를 정도의 층수가 둘 사이에 놓이게 되면서 각자의 애환은 스스로 어루만져야만 하는 상황이 늘어났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시절엔 둘중 하나가 업무 과부하가 걸리거나 상사에게 한소리 거하게 듣는다 싶으면 슬쩍 불러내곤 했었다. 회사 선배들이나 거래처 앞에선 못할 한탄을 내뱉다 보면 스트레스도 조금은 풀리는 듯 했다. 치열하고 냉혹한 사회에서 위로를 구할 수 있는 '내 편'이 옆에 있다는 건 위안거리라고 생각하면서.

 

 

마포에서 유명하다는 평양냉면집에 갔다. 육수가 입맛을 딱히 당기진 않았지만 담백했다. 심심한 맛이지만 이내 술술 들어가고 편안하게 소화되기까지 하는 평양냉면. 맵고 짜고 때론 쓴 회사 생활도 이 음식을 반만 닮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또 한숟갈 입에 떠넣는다.

 

식당 앞 골목길에서의 잡담 중에 또 업무 메신저가 왔다며 형은 한숨을 폭 쉰다.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길 잠시, 왠걸 활짝 피는 얼굴이다. 팀장님께 칭찬받았단다. 

슬쩍 본 메신저 창에는 이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우리 ○○씨가 챙긴다고 고생했으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

 

 

 

 

어디가 칭찬 포인튼지 헷갈려 핸드폰과 형의 눈치를 번갈아보고 있자니 콕 찍어 말해준다.

 

"아이~ 여기 있잖아, 나 고생했다고 두둔해주는거. 그리고 여기 '우리 ○○씨'.."

 

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양 볼이 발그레해진 형이 카페 가서 커피나 한 잔 하자고 앞장선다. 뒤따르며 괜시리 기분이 좋다. 회사 이야기중에 말꼬리가 가벼워진 것이 얼마만인건지. '우리' 라는 두 글자에 웃는 직장인들이다. 2음절 소리를 내는 딸랑이를 보고 방긋대는 서른이들이다.

 

갓 들어온 신입사원들과 조직 이동으로 신입 아닌 신입사원 신세가 된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은 조직 분위기 적응이란다. 엄함이 미덕이라 믿는 기수 눈치를 보며 달리는 말은 발을 헛디뎌서든 힘 빠져서든 넘어진다. 안 그래도 남의 집 온 듯 긴장하며 생활 중인 사원들에게 당근 없는 채찍질은 출근시간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다. 

 

사원들은 서툴다. 사원이니까 서툴수 밖에 없다. 엉성하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지만 잘한다 잘한다 해주다 보면 어느새 정말 잘하고 있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듯 이건 시간의 문제니까. 초장에 길들인다며 타박 거하게 하는 조직에서 농민의 난으로든 뭐로든 사고가 터진 이야기를 듣자면 칭찬에는 분명 플라시보 효과가 있나 보다.

 

공자의 애제자인 안회에게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의 일화가 뒤따른다. 소쿠리의 밥 한덩이와 표주박 물 한그릇을 마시는 삶 속에서도 즐거워할 줄 아는 청빈한 삶의 전형. 소소한 것에 만족하는 그 마음만은 새 조직에 들어선 신입도 비슷하다. 짧은 칭찬과 격려 한마디에 신이 나고 힘이 난다. 쓰다듬 받은 강아지가 재주를 잘 부리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만물의 영장은 어련할까?

 

'우리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당신, 우리애 기 죽게 왜 뭐라하는 거야!!'

 

누구든지 집에서는 이쁜 '우리 애'다. 무조건적인 애정과 응원을 받아오다가 사회에선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니 퍽 당황스러워 한다. 특히 초반의 온도차는 확연하니, 처음 보는 사람이 차라리 낫겠다 싶을 정도의 냉랭함이 풍길 때 마저 있는 회사라는 공간. 그래서 작은 칭찬과 조그만 격려에도 감동하고 행복해할 수 있는 곳이다. 역으로 작은 칭찬과 조그만 격려로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베푼 칭찬은 존경과 인망으로 다시 돌아오니,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 요즘 말로 개이득!!

 

'안똘똘씨는 도대체 하는 일이 뭐야?? 그것도 못하나?'

'노똑똑씨, 빨리 좀 해서 줘요!! 무슨 하루종일 할 참인가..'

 

 

상가 복도에서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내 새끼'를 경비원이 야단쳤다. 한달음에 가 왜 애 기 죽이냐며 되려 목소리를 높히는 '아빠'는 그 날 낮엔 신입사원 면전에서 혀를 쯧쯧 차던 '회사원'이었다. 그 친구도 어느 집 귀한 자식임을 알면서도, 회사는 일하는 곳이라는 나름의 논리로 책망을 합리화한다. 상사부일체란 말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네 새끼는 진짜 내 새끼가 아니니 굳이 감싸 안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니깐!!! 난 많은 거 안바란다니깐?????"

 

커피를 기다리던 형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슬쩍 건네지는 칭찬에 하루의 피로를 잊고 웃음지을 수 있고 은근한 독려 문자 한 줄에 내일의 출근이 두렵지 않게 되는 신입들의 소박한 바람. 웃어 주시는 팀장님과 어깨를 감싸 안는 선배의 앞에서 유치하게나마 커져 가는 소속감이다.

 

신입과 그 윗분들의 시계는 반대로 흘러간다. 언젠가 서로의 전성기가 뒤바뀔거다. 과거의 새파란 애송이를 진작 챙겼어야 했다고 아쉬워할 날이 온다. 누구 뒤에선 후배들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걸 보며 본인도 진작 그 용병술을 써볼걸 싶을거다. 잘했다, 고생했다, 돈 한 푼 들지 않는 그 한마디의 위력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며.

 

호칭이 사람을 만든댔다. 우리 애, 내 새끼, 말부터라도 정 붙이다 보면 정말 우리 애가 되어 있다. 그렇게 탄생한 우리 아이들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상사를 그 새끼가 아닌 '우리 선배님'으로 꼬박꼬박 불러줄거다. 당겨주고 밀어주는 사이 쌓이는 선후배 유대의 온기는 추운 날 언 손을 녹여줄 난로가 돼주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