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뉴저지에 있었다. 일요일이었지만 출장으로 왔기에 오후엔 출근을 해야 한단다. 출장지에 먼저 도착해 계시던 팀 선배와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아침 시간 뭐할 거에요? 푹 쉬다가 출근?”
“타임스퀘어 어귀나 걷다 오려 해요.”
빨간 양념 방울이 보글대는 순두부 뚝배기와 ‘맨햍은’ 발음은 다소 부조화스러웠지만, 정말로 그 이유 하나만으로 호텔 문을 나서게 된 다음 날이었다. 점심 시간 전까지의 그 짧은 휴식 시간을 길 건너 맨해튼에 잠시 들르는 것으로 쓰기로 했다.
구글 맵으로 검색하니 호텔에서 버스 정류장은 5분 거리로 보였다.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다시 방으로 올라가 점퍼를 챙겨오니 9시 22분. 버스가 오기로 한 시간은 9시 28분이다. 놓치면 2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추운 뉴저지 기온 속에서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모자까지 푹 눌러 쓰고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길만 보고 걷다 보니 가슴팍과 소매엔 언제 튄지 모를 커피물이 들어 있었다.
5불을 내고 쿼터 동전 두 개를 거슬러 받았다. 158번 버스는 허드슨 강을 왼쪽에 끼고 똑바로 직선 주행을 한 뒤 다리를 건너 맨해튼 Port Authority 정류장에 섰다. 내린 시간은 딱 10시. 그리고 주재원과의 점심 식사는 오전 11시 40분. 11시에는 출발해야 할테니 59분 남짓 남은 셈이다. 딱히 뭘 하기엔 짧지만 거리를 걷기에는 충분하니 2015년에 찍어 뒀던 발자국을 찾는 시간이 시작됐다.
랩퍼 Jay-Z 의 ‘Empire State of Mind’ 를 틀었다. 15년 전 내가 처음 포틀랜드 국제 공항에 도착해 미국 땅에 발을 디딜 적 들었던 노래. 2020년까지 앞둔 요즘엔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다만, 후렴구에서 반복적으로 귀를 때리는 'New York' 에 맛 들리면 아주 그냥 개미지옥이야~
그리하여 뉴요커는 이렇게 걷는다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박자에 걸음걸이를 맞추었으니, 2015년 발자국은 언제 찾누?
‘딴딴딴딴- 딴딴- 딴딴-'
정류장에서 5분 거리에는 타임스퀘어가 있었다. 그대로 한바퀴 빙 돌았다. 집에서 5분 거리인 같은 이름의 타임스퀘어를 돌 때 와는 사뭇 다르다.
어디선가 배웠음직한 K-하트를 그리면서 사진 찍자 놓곤 돈 내라고 멱살 잡을 인형탈 쓴 아저씨들은 변함 없다. (나중에 테러리리스트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그들이 왜 탈을 쓴 건지 뒤늦은 이해를 했다) 본인 음악이라며 CD를 손에 쥐어 주면서 자기 손엔 돈을 쥐어 달라는 거리의 뮤지션인지 노래하는 김깡패인지도 그대로다.
소박한 관광객 모드로 타임스퀘어 사진을 몇 장 담아 가족들에게 보냈다. 이어서 5년 전 함께 뉴욕행을 했던 친구들과의 메신저 창에 올렸다. 참여 인원이 대화를 확인하면 사라지는 노란색 숫자가 6에서 0이 되기까지 만 하루가 걸렸지만 끝까지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ㅎ (서운) 당시 뉴욕 여행을 준비한 건 나고 그들은 따라왔을 뿐이었으니, 기억을 걷는 보폭과 그 속도도 필히 다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직까지도 답 없는 걸 보면 걷긴 커녕 일어서지도 않은 것 같다.
2015년 1월에 나와 친구들이 추위 속에서 잠시 피신한 M&M 초콜릿 건물에 역시 찬바람을 피해 들어왔다. 이쯤 되면 초콜릿 하나 사줘야 하겠다 싶기도 한데, 5년 전에 이어 종업원을 두 번이나 실망시킨 나는 역시 대한민국 국회의원 감인가 보다. 길목에선 우리 회사 전광판도 봤다. 학생 시절 스칠 땐 이곳에 무려 4년이나 몸 담게 될지 그땐 생각이라도 해봤을까나?
록펠러 센터를 지나 도착한 곳은 트럼프 타워. 이 건물 주인 아저씨를 그땐 존경해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한바퀴 걷고 가곤 했었는데. 2층의 스타벅스에서 에그녹 라떼를 한 잔 사서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전에 들렀을 땐 설 곳도 부족했었는데 이젠 몇 없는 좌석마저도 비어있다. 강화된 건물 보안과 줄어든 방문객들은 로비 가운데서 반짝이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중심으로 희한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 크리스마스 되기를 ★☆
가본 적 있는 장소로 여러번 발걸음하는 걸 좋아한다. 똑같은 책을 처음 읽을 때와 다시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 여행지도 마찬가지다. 5년 전 그날도 눈이 오고 있었음을 회상하며 같은 길을 꽤나 익숙하게 걸어갔다. 첫 방문과 다음번 사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그 시간적인 간극으로 감상도 자연스레 달라진다. 서 있는 장소는 같다만 다가오는 느낌은 더이상 같진 않을 거다.
예나 지금이나 맨해튼 타임스퀘어에는 형형색색의 브랜드 전광판이 깔려 있다. 4년 전에도 그 자리에서 송출되고 있던 광고들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고객층을 대상으로 같은 목표(이익 추구나 브랜드 이미지 상승과 같은) 추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은 교육 사업체를 운영하던 2015년의 내가 이곳에서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얻길 바랬다면, 글을 쓰는 지금은 창작의 영감을 받아 가고픈 거리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그대로인 맨해튼에서 변한 건 다시 방문한 나뿐인 것 같다.
어쩌면 나만이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광고판의 컨텐츠는 매시기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스토리 라인으로 변경됐을터, 디자인이나 인테리어같은 하드웨어적 요소도 몇 번은 바꿔 나갔을거다. 실적과 소비자 반응에 따라 브랜드 담당자가 바꼈을 수도 있다. 빠르게 변하는 최근 산업 트렌드 하에선 대기업이라고 봐주는 경우가 없으니 아에 사라져버린 브랜드 마저 있을 법하다.
그간 내게도 고난이 있었을지언정, 또 여기저기를 쥐어 터져가면서도, 나다움 하나는 꼭 쥐고 걸어왔다.
다시 찾은 장소에서는 기억이 살아난다. 머무는 시간이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발자국만 쳐다보며 짧게나마 따라 걷다보면 언젠가 고개를 들게 되는 때가 온다. 새로운 걸음을 할 때가 왔음을 직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어느새 발은 발자국보다 커져 있다. 묵혀둔 추억을 찬찬히 걷어내고 그 자리에 지금의 감상과 의지를 놓자. 다음에 오게 될 땐 이번 기억을 걷게 되리라는 생각과 함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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