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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66 죄송해서 죄송합니다

“요즘 애들은 사과할 줄을 모른다니깐~"

 

점잖아 보이는 노신사 입에서 나온 말에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와중 옆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계셨는데, 십이지장에서부터 우러나온 것 같은 진담을 농담인듯 내던지는 요령은 그간 먹었을 회삿밥의 양을 짐작케 했다.

 

월요일인 오늘의 오전 루틴업무는 시장 데이터 정리.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추출 후 엑셀 작업해서 팀 내 공유를 해야 한다. 가끔 파티션 건너편에서 '어, 숫자가 좀 이상한데?' 소리가 들려오면 한숨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할 만하다.

 

 

 

Raw데이터 뽑는 건 더 쉽다. 라면 물 올리듯 전산 화면에서 몇 개 클릭하면 알아서 대령한다. 자동화다. 좋다. 탕비실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오는 시간이면 데이터가 추출된다. 모처럼 창가에 앉아 집에서 싸온 삶은 계란까지 먹는 여유를 부렸다.

 

돌아왔더니 데이터가 안 뽑혀 있다. 종종 있는 일이라 'failed' 메시지 창을 닫고 아까의 클릭질을 재개 했다. 자리에 얌전히 앉아 관전한다. 2차 'failed'. 3차 시도에는 화면만 뚫어지라 쳐다봤다. failed. 빨리 데이터를 뿌려야 한다. 별 것도 아닌 일로 한소리 들으면 하루가 힘들어진다. 어쩐지 아까 계란 껍질이 유난히 안 벗겨지더라니.

 

 

 

 

염려하던 일이 시작됐다. 데이터 언제 볼 수 있냐는 첫 연락을 받으며 가슴이 답답해지고 조바심이 난다. 침이 마르고 입안엔 딱딱한 게 씹힌다. 아무래도 계란 껍질이 제대로 안 까진 것 같다. 데이터 추출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법안 개정도 아니고 10차 시도까지 갔다만 보이는건 텅 빈 화면 뿐. 시스템에 명시된 관련 팀마다 전화해봐도 서로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계속 돌려준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돌려나가면 처음 통화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익숙한 목소리의 그녀가 일단 기다리란다.

 

결국 데이터 공유는 늦어졌고 한소리를 들었다. 변명처럼 들릴지언정 정확한 상황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 시스템 문제로 이러저러했다고 말씀 드렸다.

 

"그냥 '죄송하다, 다음부터 유의하겠다' 한마디 하면 되잖아?"

 

점심을 먹고 올라오는 길에 과장님이 오전 일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다. 똑똑한 사회생활의 모범 답안이긴 하다. 나는 듯 빠른 그의 걸음걸이와는 반대로 내 발은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그저 허공에 울려퍼진 속마음. ‘시스템이 이상한 거지, 사실 제 잘못은 아닌 거잖아요..’

 

 

팀 회의. 오퍼레이터인 내 랩탑에 프로젝터를 연결했다. 잘 되다가 갑자기 화면이 멈췄다. 3년을 넘게 쓴 이놈의 고물이 또 말썽이다. 팀장님 눈치를 보면서 요리조리 해보다 옆자리 선배에게 슬그머니 HDMI 선을 넘겼다. 별거 아닌거 같지만 눈치 넘어 눈치를 보던 고난의 시간이었다. 다음에 또 그 이유를 대면 윗분들이 짜증내실 수 있다며 슬쩍 팁을 주신 선배님껜 감사하지만 정비를 받아도 말썽인걸요..

 

예로부터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셨단다. 회사에선 시스템의 잘못, 기기의 잘못, 천재지변의 잘못, 그리고 나의 잘못은 하나다. 적어도 여기에선 그런가 보다. 죄송해서 죄송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