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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트투어 김사자] 행복.1 사랑에 빠져버린 날

"뇌가 휴식하는 기분이었어요."


클래식그룹 앙상블 디토(Ensemble DITTO) 의 전 멤버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Stefan Pi Jackiw)와 피아니스트 지용을 만나고 왔다. 정확하게는 두 사람의 무대를 다녀왔다ㅎㅎ


공연의 제목은 <DEAR CLARA>. 친애하는 클라라에게 혹은 사랑하는 클라라에게.

클라라.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의 낭만주의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의 부인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이다. 

어? 어디서 들은 것 같다고? 베이커리 겸 카페 '슈만과 클라라'의 걔들 아니냐고? 맞다. 빵 좀 드셨나보다.

공연에 앞서 이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간단하게라도 알고 들으면 더 재밌다.


우리가 아는 음악의 대가 로베스트 슈만(앞으로는 그냥 슈만이라고 부르겠다)은 원래 법률가가 되기 위해 열공하던 범생이였다.

괴테와 니체가 다녔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 케이스 스터디에 정신없었을 그는 20살 때 파가니니의 연주곡을 듣고 음악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걸 요즘 말로 인생곡이라고 하지. 딱 듣고 '아, 음악이야말로 나의 길이다!' 하고 삶의 방향을 재설정해버린 슈만. 멋지다. 남자다잉.

그렇게 음악가로서는 다소 늦게나마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k)의 문하에 들어가서 열심히 열심히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던 그는 피아노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을 궁리하다 그만 손을 다쳐버린다!!! 피아노에 인생을 걸었지만 더이상 연주자가 될 수 없었던 슈만. 슈발ㅠㅠ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사랑으로 그 아픔을 극복하게 된다. 바로 스승의 딸 클라라 비크와. (사실 전해오는 이야기라 손을 다치고 난 후에 사랑에 빠졌는지, 아니면 사랑하고 있던 와중에 다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아빠들의 딸사랑은 어마무시하다. 안그래도 금쪽같은 딸래미인데다가 클라라는 당시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앞날이 창창한 유망주였으니 말다했지 뭐. 예상대로 프선생님은 둘의 사랑을 심히 반대했다. 그래도 의지의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을 이뤘고, 드디어 우리가 아는 슈만 부부가 탄생하게 된다.

남자들은 그렇지 않나? 결혼식날 사랑하는 신부에게 직접 쓴 곡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 특히 어지간한 남자들은 음악 좋아하고 노래 좀 한다는 한국에선 더 할 것이다. 

슈만은 그걸 했다. 결혼식 전 날 클라라를 위해 쓴 가곡집 '미르테의 꽃'을 바쳤던 그. 아 이 형 너무 멋있는거 아냐?ㅜ

26개의 곡 중 첫번째 곡인 '헌정'이 특히 유명한데, 이 곡은 그 뒤 피아니스트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다. 클라라누나에 대한 사랑과 정열을 담은 슈만이형의 '헌정' 한번 들어보자.  


https://youtu.be/2pWEObMvEHs

▲ Liszt- Schumann's Widmung (손열음 연주) (출처 Youtube)


이야기엔 한 청년이 더 끼어든다. 바로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응~ 브람스 자장가의 그 브람스.

브람스의 재능을 알아본 슈만은 그가 그러했듯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며 지도해주기 시작했고 그덕이었는지 브람스군은 어엿한 음악가로 성장한다.

한솥밥 먹으며 연주며 작곡이며 알려주다보니 자연스럽게 브군에게 슈만은 음악적 스승이자 인생의 멘토가 되었고, 사모님인 클라라와도 각별한 사이가 형성되어갔다.

이후 슈만이 우울증에 시달리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유를 모르겠다ㅜㅜ 천재 음악가의 숙명의 키워드는 불행인 것인지..)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위안이 되어주었고 그녀가 사별하고 난 후에도 챙겨주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그가 클라라를 마음 속으로만 사랑했는지 서로 사랑했는지는 정확친 않지만 당시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줬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늘 함께 회자되고 아직까지도 이 셋의 곡과 이야기는 한데 어우러져 무대가 마련되니 가히 아름다운 Love Triangle이 아닐 수 없다. 삼각관계란게 아름답다고하면 여자친구에게 머리를 쥐어뜯길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은 음악계에 길이 남을 숙명이요 예술 그 자체다.


소싯적 연애토크쇼의 PD이자 MC였던지라 이 세 남녀의 이야기를 접하곤 흥미가 돋아 사실 자주 찾아봤었다ㅎㅎ

이제 19세기의 이 사랑과 이야기와 음악을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우리시대의 음악가들을 만나보자.

스테판 피 재키브, 그리고 지용.





"가늠할 수 없는 재능" - 워싱턴 포스트

"전설이 될 수 있다" - 시카고 선 타임즈

"반드시 대성할 것이 틀림없다" - 시카고 트리뷴


오늘의 주인공 스테판 피 재키브와 지용을 수식한 말들이다.

실제로 보고 듣고 느꼈던 그들의 재능은 아직 음알못인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설레는 마음에 공연장에 1시간도 일찍 도착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했는지 아직 아무도 없다.

주차장 보도블록에 걸터앉아 옆사람과 이야기하는 흰 셔츠와 8부 팬츠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낯익은데, 설마. 뭐 스텝이거나 관객이겠지.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도 처리하고 다시 공연장에 들어갔다. 이제야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 여기가 오늘 공연장소 웃는얼굴아트센터. 좌측에서 5번째 현수막이 오늘의 공연 <DEAR CLARA>


박수와 함께 등장한 스테판과 지용. 어? 한 명은 낯익다.

셔츠 단추를 한 열 개는 푼 것 같은 아찔한 패션에 발목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8부 바지. 아까 주차장의 그다. 지용.

... 헐 ㅜㅜ 설마설마 혹시나 했는데

솔직히 스텝인지 알았다..ㅎㅎ (지용씨와 팬분들께는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그 날 운전을 많이 했고 또 더운 대구 날씨 탓에 내가 제대로 못 본 것이었으리라)


특히 피아니스트 지용의 연주를 본 사람이라면 아시리라. 그가 얼.마.나. 열정적인 연주를 하는지 ㅎㅎㅎ

연주를 위해 무대에 처음 오르는 그 순간부터 직감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우리 종족인 친구.

가슴이 추워보일정도로 풀어헤친 셔츠, 발목이 보이는 바지에 짧은 머리. 의상부터 표정에 제스쳐까지, 진정으로 음악을 즐기는 악동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정말 씬스틸러 수준으로 시선강탈해버릴 정도로. 정신없이 듣다가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연주 들을 때 나는 안그래도 깊이 빠져들어서 무아지경이 되버리는데 위트있는 그의 연주는 내 흥을 정말 한껏 올려주었다. '유쾌' 그 자체였다.


반면에 스테판 피 재키브는 의상부터 착 가라앉은 검은 셔츠에 바지. 주변의 분위기를 진지하게 만들어주는. 집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전형적인 엘리트, 전형적인 천재의 모습. 반듯하다. 의젓하다. 전교회장감이다. 내가 부모면 아들이 저렇게 크길 내심 바랬을 것 같다. 그의 외조부는 시인이자 수필가인 고 피천득선생. 그러고보니 턱선이나 얼굴형이 비슷한 것 같다. 책장 한켠에 꽂혀있는 시집 <인연> 에 눈이 간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 손자의 연주를 듣고 난 후 할아버지의 글을 읽는다. 그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후딱 글 마무리하고 읽어봐야지. 기대가 된다. 예술은 이렇게 돌고 돌며 서로 영감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 실로 아름다운 선순환 관계. 이러니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악동과 전교회장. 이리도 다른 아우라를 지닌 그 둘의 연주가 어찌나 잘 어우러지던지.

남성 듀오의 연주는 정말 오랫만에 듣는데 전체적으로 힘이 느껴졌다. 활을 긋고 건반을 튕기는 소리 하나하나가 신선한 제주산 고등어가 펄떡거리는 듯 살아있었다. 힘센 생선이라그런지 제주도 고등어회는 정말 꿀맛이다. 이 두 남자의 연주도 꿀맛이었다.

 

 

나도 집에서 가끔 피아노를 치곤 하는데, 어느날 슬며시 연주를 듣던 어머니께서 '남자가 연주하니까 역시 힘이 느껴지네~' 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게 무슨 소릴까 했는데. 이번 기회에 알 것 같다. 같은 곡을 여성연주자가 연주할 때랑은 다른 에너지가 느껴진다.

단순히 세게 누른다는 식의 힘말고,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 무대는 비교적 작은 크기였는데, 그래서인지 공간에 음악이 꽉채워지는 느낌이라 좋았다. 앞자리라 더 좋았다.


▲ 이번 공연 포스터 디자인은 살짝 아쉽다.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가. 상하반전의 사진은 왠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 배틀이 떠오르게한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사실 같은 주제로 작년 11월 클라라 주미 강x손열음 듀오 콘서트를 다녀왔었다.

그러다보니 같은 곡도 몇 개 연주되었는데 그때의 기억과 감각을 더듬어 비교하며 들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 중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세 개의 로망스 Op.22'를 한번 들어보자. 


https://youtu.be/27CKHIwgy5Y

▲ Clara Schumann - 3 Romances, Op.22 - I.Andante molto (클라라 주미 강&손열음 연주) (출처 Youtube)


이 곡은 정말 제목대로 안덴테 몰토, 알레그레토, 라이덴샤프틀리히 총 3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클래식을 처음 듣는 사람들도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로망스스러운 곡이다. 클라라 슈만은 정말 멋진사람인 것 같다. 그 시절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을 했고, 슈만과 결혼하며 그 때까지 쌓아온 피아니스트란 커리어를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남편을 격려하며 다시 작곡 및 음악활동을 이어나갔다니. 그 멘탈과 결단력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부부로서, 그리고 정신적 연인으로서 서로에게 삶의 의미가 되어주고 예술적 영감과 애정을 주고 받은 이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 3인의 무대는 함께 마련되고 또 그들의 사랑과 음익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스테판 피 재키브x지용, 클라라 주미 강x손열음. 이 두 쌍의 듀오의 연주의 특징은 '섬세함'인것 같다.

서로를 잘알아서 그런 것인지, 메꿔줄건 메꿔주고 부각시켜줄건 서로 부각시켜주며 정말 잘 어우러진다.

이 섬세함으로 연주된 슈만과 브람스, 클라라의 곡을 듣자니 한껏 나른해지고 머릿속이 편안해진다.


▲ 끝나고 여기서 팬사인회를 가진 스테판 피 재키브와 지용. 저곳에 앉으면 어떤 느낌일까? 


▲ 이런 느낌이다. 초상권은 김사자가 지켜준다잉


▲ 으헿ㅎ 나도 사인받았어 :-)

 


스테판 피 재키브와 지용의 무대. 군더더기없이 깔끔했고 편안했다.

회사일로 지친 머릿속이 환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늘 방안을 강구해야하던 뇌가 쉬는 기분이었다. 얼마만인지 몰라 생각을 잠시 멈추고 선율에만 집중해보는게. 

이런 시간이 난 정말 너무 필요했는데.


차근차근,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그들을 한 명씩 만나간다.

슈만과 브람스, 클라라가 서로에게 영감과 영향을 받았듯이 예술 내 삶에 그것들을 준다. 이게 바로 행복아닐까?

바이올린, 피아노, 클래식. 어쩜 이름도 이리 이쁠꼬.

슈만이 그러했던 것처럼, 클라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브람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사랑에 빠져버렸다.


사랑에 빠져버린 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