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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입사원김사자] Ep.7 막내로 살아간다는 것

사무실 문을 다시 연 시간 10PM. 출입문에 사원증을 찍어야 하는데 손이 안 올라간다. 유리문에 비친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다. 한숨을 푹 쉬고서야 문을 열어 제친다.

 

네 시간 전 이 문을 열고 나갈 땐 내일 아침 8시쯤에야 다시 들어올 거라 생각했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고. 그런데 왠 걸? 자연 속에서 식사를 하던 나는 차로 1시간을 꼬박 달려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지금쯤 팀원들은 2차가서 신나게 술을 먹고 있겠지? 졸리니까 물이라도 큰 컵으로다가 한 잔 마셔야겠다.

 

회식 날이었다. 임원급이 와서 교외로 나가 한적한 분위기에서 찜닭에 닭구이까지 맛난 저녁을 했다. 쉴새 없이 달려드는 모기 떼에게마저 관대했다. 퇴근을 했고 회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무실을 벗어났으니.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지만, 이런 분위기에 어찌 한 잔 않을고? 소맥 한 잔에 소주 두 어 잔으로 딱 기분 좋을 정도. 시골 평상 위에서 맛난 안주에 한 잔 두 잔 먹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싶었다. 그때 나를 돌아보며 누가 한마디 던졌다.

 

"너 술 많이 안 먹었지? 미안한데 내가 많이 먹었으니까 오늘 밤에 대신 내일 회의자료 좀 만들어라."

"..."

"하기 싫나? 그럼 내가 할까? 술 이빠이 먹고 내가 들어가서 해?"

 

대답을 망설이다 그럼 대충이라도 해놓겠다 했다. 그는 대충이란 건 없다며, 할 거면 잘하라고 했다. 옆에선 한 술 더 뜬다.

"막내가 일이 많다는 건 좋은거다!"

 

그 옆에서도 거든다.

"아유~ 당연히 막내가 해야죠~"

 

 

 

 

당장이라도 사무실로 돌아가서 자료를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간다. 가야만 한다. 이젠 정말 갈 수밖에 없겠다. 나는 막내니까. 까라면 까야 하는 막내니까.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2차로 어딜 가자니 왁자지껄이다. 회사 다시 들어간다고 인사하려고 뻘쭉하게 서있으니 고립무원이 따로 없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여덟 시 반이었다.

 

회식장소에서 회사까진 1시간 거리. 도착하니 밤 열 시가 다 됐다. 더 이상 화도 짜증도 나지 않는다. 체념하고 자리에 푹 주저앉아 키보드를 두드린다. 10시 반 - 11시 - 11시 반, 그래도 조금씩 모양새가 나오는 듯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뿌듯하다. 득보다 실이 훨 크지만 그래도 이 맛에 회사 다니고 이 맛에 야근한다 싶었는데..!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차장님인걸 알았죠.. 비틀 섞인 뚜벅 걸음으로 들어온 그 분께선 책상서 주무셨고 그사이 나는 마무리 작업을 했다. 다했다 말씀드리니 검토한다고 줘 보라신다. 칭찬해줄지 알았다. 적어도 수고했다는 한 마디는 들을 줄 알았다. 역시 나는 순진했다.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오잖아.. 나도 잘 만드는 편은 아니지만, 닌 참.."

 

안다. 나는 아직 많이 미숙하단 것을. 자료를 읽을 때도, 장표를 만들 때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요령도 부족하고 경험도 적다. 그래도 밤 열 두 신데. 그래도 술 먹다 총대 메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열심히 했잖아..

 

선배가 부르면 벌떡 일어나는 막내들, 복사해오는 막내들, 짐 나르는 막내들. 예전엔 다들 잘 나갔을거다. 학생회장에 청년사업가에 단체 대표에 멋지게 인정받으며 살아왔을거다. 어쩌다 이러고 있는 걸까? 잠시 눈물 좀 닦고 올게. 직장인이 된 지 18개월차, 대한민국 회사에서 막내로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팀의 막내다. 팀장님을 필두로 우리 팀은 차장 1명, 과장 1명, 과장급 대리 1명, 그리고 사원 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사원 중에서도 막내가 내 포지션이다. 유교문화가 뿌리깊은 사회에서 이 '막내'라는 위치는 참 녹록치 않다. 막내는 잡일 전담인원으로 공공연하게 인식되어 있다. 똑똑해도 잡일을 해야 한다. 나는 막내니까. 잘생겨도 잡일을 해야 한다. 막내니까.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막내이기 때문에.

 

어느 집단에서나 막내는 생기게 될 거고 필요하다. 배우는 사람의 자세로 팀내 비용처리, 실적정리, 물건 나르기나 심부름 등 잡다한 일을 어느정도는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막내라서 잡일을 당연히 한다는 건 절대 아니라 '상식적인 선' 안에서, 막내로서 선배들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원해서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거다.

 

안 그래도 일이 손에 덜 익어서 업무처리도 늦은데 잡일까지 챙기다 보니 정작 본업을 챙길 여력이 부족한 때도 태반이었다. 동기형과 막내 라이프의 애환을 이야기하던 중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하.. 후배 들어오기만 해봐라. 이 잡일들 그대로 다 넘겨준다."

 

그때 들은 형의 대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똑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 우린 더 나은 사람들이니깐."

 

막내들에게는 후배가 들어오는 시기가 다들 기다려질거다. 자질구레한 일에서 비로소 해방되고 본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순간이기도 하다. 막내 탈출에 환호하며 잡일하지 않는 근엄한 선배의 위엄을 보일 건지, 막내에게 쏠리게 될 업무를 어느정도 함께 분담하며 조금씩 분위기를 바꿔 나갈 것인지.

 

다들 겪는 막내라지만 그 자리엔 꽤 많은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기죽지 말자. 단단해지자. 넓은 가슴으로 모진 말마저 담아낼 수 있는 그릇 큰 막내가 되자. 언젠가 찾아올 후배를 아껴줄 수 있도록. 힘내자 막내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