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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몇가지 안 좋은 점은 ‘야근’이란 게 있다는 거고, 몇 안 되는 좋은 건 그 단어를 넣으면 거의 모든 경우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 마법의 문장이 완성된다는 점이다. “어떡하지? 나 오늘 야근이야.”

 

야근을 한다니. 조직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의례 공감이 바탕이 된 동정을 하게 되는 말이다. 그 슬프고 잔인한 단어에 대고 쯧쯧 혀를 차다 보면 뒤따르는 다음 문장은 흘려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오늘 못 볼 것 같아.”

 

 

행여 잘 들었더라도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 그냥 토닥여주고 만다. 못내 아쉽고 서운하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눈물 이모티콘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며 넘어간다. 같은 신세니만큼 야근의 거북스런 부담감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괜찮아, 다음에 보면 되지.”

 

마무리 되는 대화 이후 야근한다던 사람은 보통 자리로 돌아가 우울한 야근을 하지만 다시 앉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은 야근하는 날이 아니었으니까.

 

 

 

 

발걸음은 약속장소 대신 집으로 향한다. 결코 거창하진 않은, 소소하고 사소하기까지 한 뭔가를 위해서 간다. 예를 들면 집밥 먹기, 주말에 덜 본 드라마 마저 보기, 책 읽기, 홈 트레이닝(고작 팔굽혀 펴기 몇 번이긴 해도), 누워서 빈둥대기. 우정에 비해 별 거 아닌 그게 오늘의 나에겐 너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약속을 물리는 경우는 급 정지하는 버스나 몰려오는 화장실의 부름처럼 갑자기 결정된다. 핑계에 지나지 않겠지만 굳이 이유를 대자면, 지쳐버려서. 업무와 사람 사이에서 고돼가는 몸과 마음은 일이 특히 많거나 상사가 변덕스런 날엔 누더기 마냥 해진다.

 

피로를 끌어안고 사는 게 직장인의 숙명이라지만 완전히 방전됐을 땐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업무를 쳐내느라 진이 빠진데다 짜증 한 사발씩 받아내면 모든 게 귀찮다. 하루의 고단함을 한 잔하며 풀고픈 마음이 든다면 그나마 버틸 만했던 날인 거다. 한계치에 다다르면 친구도 만나기 싫고 술도 싫고 번화가는 더 싫어진다. 말 그대로 지쳐버렸기에 입도 벙긋하고 싶지 않아진다. 그냥 방구석에나 들어가 그대로 드러누워야지.

 

 

언제나 변명거리는 풍부하고 길기까지 하다. 그렇게 관계에 지쳤다며 사람에게 질렸다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음을 느끼는 순간, 메시지를 보낸다. '나 오늘 야근해야 할 것 같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다더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매우 의도적으로 지인들을 바람 맞혀 버린 셈이 된다.

 

야근한다며 취소한 약속이 스무 건은 될 것 같다. 그 중에 5일 정도는 가짜 야근날이었던 것 같고. 솔직하지 못했던 점이 더 미안스럽다만 진짜 이유가 괜한 화만 불러 일으키진 않을까 싶어 갖다 붙여버린 그 이름 야근.

 

소주나 한 잔하자던 친구야, 그 날 나 야근 아니었어. 너무 피곤해서 집 가서 일찍 잤어. 언젠가의 여자친구야, 그때 회사가 아니라 헬스장이었어. 운동하고서야 만난다고 너무 서운해했던 거 같아서 그냥 야근한다고 했었어. 여러분들아, 모임 있던 날 별로 떠들고 싶은 마음이 아니더라. 그래서 야근이라 말하고 집에서 혼자 드라마나 봤어.

 

귀찮아서 그랬던 게 아니라 보기 싫어서 그랬던 건 더 아니라… 긴 변명 한 번 들어봐 줄래?(술도 살게) 일단은, 사실 그때 나 야근하는 날 아니었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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