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하관을 잃어버린 시절이 있었다. 호흡기를 통해 전파된다고 알려진 대륙발 역병이 세계를 휩쓸면서 모두가 입과 코를 마스크로 꽁꽁 싸매고 다닌 날들이었다. 정책이 완화된 지금은 실외에선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지만 아직도 거리의 대부분은 맨얼굴이 아니다. 감염 걱정이 되어서 그러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닌데, 그냥~ (벗는 게 어색해져서 쓰고 다녀)" 같은 애매한 답변이 돌아온다.
답답하다며 정책 변경일 출근길부터 바로 마스크를 벗어 던졌지만서도 굳건하게 코와 입을 가린 인파 속에서 눈치가 보여 마스크 줄을 다시 양귀에 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관을 감춘 자들 사이에서 홀로 드러내고 있자니 희한하게 발가벗은 느낌 마저 들었다. 1미터 뒤에서 마스크를 벗고 걷던 하늘색 셔츠 아저씨도 양옆을 두리번 거리다 결국 마스크를 호주머니서 꺼내고 있었다. 벗었다 쓰니 어색한지 콧대 부분을 계속 매만져 가면서. 눈치가 소신과 답답함을 한끝 차이로 뛰어 넘는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
시장에 들이친 마스크의 디자인만 해도 여럿이었다. 일반적인 덴탈 마스크부터 황사기간 때나 쓰던 KF94, 생화학전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은 방(독면)역 마스크, 가운데가 톡 튀어나와 화장이 덜 묻는다며 여성들 픽 1순위인 새부리형, 파스텔톤 색감에다 무슨 장식까지 달린 것들까지 끊임없이 출시됐다. ‘마스크는 제 2의 얼굴’이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였다. 힙한 포즈와 뇌쇄적인 눈빛 아래는 익숙한 마스크를 낀 모델들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스크의 시대 이후로 하관이 없는(?)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 버렸다. 맨 얼굴을 드러내는 건 테레비 속 연예인 뿐이었다. 그 배우나 아이돌들 역시 스튜디오 조명이 꺼지면 다시 마스크를 쓰고 밥 먹으러 가고 마스크 쓰고 집으로 향한다. 의식하지 않으면 내 앞 누군가가 마스크를 꼈다는 사실 조차 잊는 것이 현실이다. 까맣거나 하얀 마스크를 착용하고 남자들의 영혼의 단짝 가르마펌에 죄다 정장 차림이기까지 한 여의도 거리 사람들을 보면 무한 복제되는 <매트릭스> 스미스 요원이 연상된다.
재밌는 건 마스크 덕에 의도치 않은 외모 평준화 현상이 발생한 부분이다. 상향인지 하향인진 몰라도 일단 마스크를 낀 하관만은 모두가 같아졌으니까. 얼굴 천재라는 차은우나 BTS의 뷔도 하관은 나랑 똑같이 생겼다. 개이득. 동시에 의도치 않은 피해자도 속출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단어 ‘마기꾼’과 함께였다. ‘마스크’에다 ‘사기꾼’이 결합된 신조어로 원래 단어 보다 입에 착 붙는다. 어감과 그 뜻의 싱크가 너무 찰떡이라 태초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궁금해지는 합성어다.
마스크를 꼈을 때와 벗었을 때의 외모 차이가 너무 심한 사람들에게 ‘마기꾼’의 칭호가 부여되고 있다. 보통은 친한 친구끼리 떠들 때나 농담처럼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술집에서 예쁜/잘생긴 사람이 보여 말 걸고 싶어서 쫓아간다거나 소개팅 상대의 실물을 마주할 때 나오기도 한다. 처음 보는 누군가의 마스크가 벗겨지는 순간 나오는 진심. ‘마스크 벗으니까 느낌이 다르네’는 양반이고 ‘이 정도면 거의 사기 수준 아니야??’까지 가기도 하는 그런 진심.
그러니까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내는 그 1초는 기대에서 실망으로 감정이 가장 빠르게 전환되는 순간이 아닐까? 물론 그 기대감이 오던 방향 그대로 쭉 가서 만족감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마스크 벗은 그의 외모가 내 기대에 충족됐을 때 혹은 그 이상었을 때처럼. 이때의 그는 아마 ‘마해자’일 거다. 마스크 + 피해자. 잘생쁜 얼굴이 마스크에 가려져 되려 피해를 입은 경우란다. 물론 연예인 급 외모가 아니고서야 이런 경우는 잘 없긴 하지만서도.
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은 마기꾼까진 아니라고 생각할 거다. 나도 그렇거든. 근데 왠만한 연예인들 조차 하관을 가려주면 보통 더 잘생겨 보이는 게 사실이라면, 혹시 대다수의 우리는 모두 마기꾼인 걸까? 하관까지 잘생기기는 그만큼 어렵다. 얼굴 윗부분이야 눈만 챙기면 된다지만 하관은 코, 입, 턱까지 얼굴의 신체 기관 대부분이 모여 있다보니 하나는 몰라도 모든 부위가 예쁘긴 힘들 거다. 그리고 희한하게 살은 얼굴 아래부터 쪄 나간다. 라면 먹고 잔 다음날은 볼따구부터 빵빵해진다. 이 한여름에도 굳이 야외에서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이유를 좀 알 것만도 같다. 여전히 날씬한 눈매를 앞세워 하관의 라면 붓기가 빠지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언더더씨를 궁금해하고 달의 뒷면을 상상하듯 당장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 궁금함이란 이름의 은근한 기대심리를 갖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찰나에 증폭되는 기대감과 그 이후에 찾아올 어떤 심리는 지금도 어디선가 실시간으로 파도 치고 있을 거고. 실망시키기도, 기대감을 충족시키기도, 때론 의외의 행복감까지 선사하는 마스크는 코로나가 남긴 랜덤박스 같다.
점심 먹으러 내려가다 오랜만에 마주친 동기에게 “오늘 따라 왜 잘생겨 보이지? 마스크를 잘 써서 그런가?” 같은 말을 듣는 걸 보면 오늘도 여의도 마기꾼1이 마기꾼 좀 한 건 맞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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