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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글, 그러다 새벽글』

여름철, 우리가 좋아하던 맛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냉장고에서 어제 산 복숭아를 꺼냈다. 하나에 무려 2,900원이나 하는 황도. 가격이 꽤 되길래 마트에서 집고도 한참을 고민했는데 소개글 속 ‘말랑말랑’ ‘달콤한’ ‘과즙 팡팡’ 3연타를 맞고는 어느새 카트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과일이나 짜장면 가격이 월급보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요상한 시국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어느새 건강을 챙겨야 하는 나이가 돼버렸으니까.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철과일 맛과 영양이 가장 풍부하다니까.

과일을 꽤 좋아한다. 하지만 챙겨 먹는 스타일은 또 아니다. 나가서 사 오는 경우는 더더욱 잘 없다.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귀찮아서일 거다. (깎아다가 주면 한소쿠리를 줘도 다 먹는다) 그런데도 봄이면 봄나물에 여름과 가을이면 또 그 철에 맞는 농작물을 잘 챙겨 먹고 있다. 하해와 같은 어버이의 은혜 덕이다. 올해 제철과일의 스타트도 ‘엄마가 보내주신’ 신비복숭아였다. 복숭아 이름부터 앙증앙증 우쭈쭈 싶은 게 꼭 엄마가 보내주실 듯하지 않냐고~ 겉은 천도복숭아 같은데 속살은 백도처럼 말랑한 요 신비복숭아는 껍질을 벗겨내려 살짝만 쥐어도 단물이 뚝뚝 떨어졌다. 달달하고 새콤한 맛이 연상돼 침샘이 침이 고였다.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턱밑이 찌릿했다.

연한 과육을 최대한 잘 발라 접시에 놓고 칼질을 잘 못해서 아직 살이 왕창 붙어있는 심을 베어 물었다.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댔다. 이런 식으로 한번 맛을 들이고 나면 귀찮은 몸이 절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엄마가 그렇-게 과일 좀 사다 먹으라고 하실 때도 귀찮다며 편의점까지도 안 들렀는데. 침샘은 근육 보다 강하다. 가히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비복숭아, 신비한 닉값 제대로 하고요. 이러한 알고리즘(?)으로 남자 혼자 사는 집 냉장고 안에 지난 주말 모셔온 말랑- 달콤- 과즙 팡 복숭아와 같은 제철과일이 하나둘 놓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복숭아를 다 먹고 옥수수를 꺼냈다. 복숭아만큼 좋아하는 여름 먹거리에는 옥수수도 있다. 술 안주로 까까 골라보라면 3쏘 2맥을 하고도 콘칩이나 꼬깔콘 군옥수수맛을 얼른 찾아 집는 나. 내 동생처럼 Z세대 언저리의 친구들은 그걸 보고는 영감 입맛이라며 핀잔 준다. 그래놓곤 다음에 또 마트 같이 가면 내 몫으로 콘칩/꼬깔콘을 챙기더라. 90년대 중반에 태어난 아이들이 정이 참 많다. 갬동쓰. 진짜 Z세대 애기들과는 슈퍼 가본 적이 없다. 어, 그냥 만날 일 자체가 없다. 어린 그들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갖기에는 나는 나이를 좀 먹어버렸다. ‘90년생이 온다’는 말이 유행하고 사내에서 가장 어리다는 소릴 듣던 - 영 앤 핸썸 앤 스마트 앤 핫 앤 큩 보이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는데.

7~8월 두달 동안 아파트 단지 안에는 옥수수 트럭이 온다. 그 트럭 위에서 바로바로 쪄서 파는 3개 묶음의 옥수수는 맛이 좋아서 동네에서 유명하다. (트럭 광고판에 그렇게 써 있었음. 실제로도 꽤 맛있고) 아저씨와의 시간대가 맞으면 현금을 주섬주섬 꺼내 일주일에 두어봉지씩 사먹고 있다. 과일로 분류되는지 야채로 분류되는지 헷갈려도 초여름 옥수수는 한번 입에 대면 멈출 수가 없다. 종류도 은근 다양하다. 카페 음료 메뉴에도 있는 노란 초당옥수수부터 쫀득한 찰옥수수, 강냉이옥수수까지.

친/외할머니댁에 가면 강냉이를 자주 볼 수 있었다. 당신들께선 그걸 참 좋아하셨다. 살짝 딱딱한 듯 쫄깃한 식감 더러 ‘알이 여물었다’고 표현하시던 할머니. 어린 나처럼 앞니로 돌려깎는 기술은 더는 구사 못하셨지만 손으로 한알 한알 까서 참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꼭꼭 씹어 먹으면 참 고소하시다고. 어린 입엔 그 알맹이가 단단한 감이 없지 않아 내미시는 걸 계속 마다하던 초중딩 내 모습도 기억 난다. 옥수수 트럭에서 집어온 봉다리 속 하나는 꼭 강냉이옥수수였고 계속 먹다보니 그 여물고도 심심한 맛을 어느새 알아가게 됐다.

옥수수알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오는데 알알이 맺힌 강냉이를 호로록 쓸어내며 까먹으면 은근 재미도 있다. '옥수수로 하모니카 불어 보라'는 그시절 어르신들의 촌스럽고도 유치한 농담이 정감 있게 느껴질 줄이야. 민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매미 소리를 들으며 옥수수를 훑고 있으면 똑같이 선풍기 앞에서 눈은 드라마 쪽으로 향한 채 부지런히 알맹이를 뜯으시던 할머니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1996년과 2022년, 여름 멀티버스의 한순간들.


여름을 좋아한다. 낮이 밤보다 길어지고 기온이 올라가 땀은 나지만 텐션도 올라가고 옷차림까지 편해지는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 한여름을 제외하면 연중 가장 왕성해지는 활동량과 식욕을 갖게 되는 여름을 좋아한다. 그리고 군고구마 보다 옥수수와 복숭아를 더 좋아한다. 어떤 과일이든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된 요즘이지만 신기하게도 제철이라고 붙여진 그 시기에 먹어야 가장 맛있게 느껴진다. 특히나 과일은 더 그렇다. 왠지 그 계절의 기운을 안팎으로 품고 있달까?

복숭아 껍질에서부터 풍기는 싱그러움과 향은 겨울보단 여름에 특히나 짙다. 옥수수에 달린 수염에서 조차 여름이 느껴진다. 과육에 즙이 밴 게 아니라 과즙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 같은 복숭아를 후룹대며 삼키는 계절. 살을 다 발라 먹은 옥수수대를 쭉쭉 빨면 단물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옥수수의 계절. 선풍기 앞에 앉아 등에 땀이 살짝 밴 채로 맛있는 제철녀석들을 게눈 감추듯 흡입하고 있다. 볼 빨간 사춘기가 부른 <여름아! 부탁해>를 무한 재생하면서, 제철이니 특히나 맛있는 것과 함께 ‘우리의 철’을 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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