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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글, 그러다 새벽글』

상수역 가는 The 아저씨

잠두봉선착장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삼쏘를 조진 후 친구와 헤어졌다. 합정동에서 경기도 구리시 우리집까지는 택시로 30분, 대중교통으로 1시간 10분이 걸리는 거리다. 지도 앱으로 확인하니 새삼 참 멀게 느껴졌다. 동쪽으로 이사 가면서 그간 주 무대 삼았던 영등포구나 마포구로는 큰맘 먹고 나와야 한다. 택시를 부르려고 주변 건물을 두리번대다가 옆에서 출발 준비 중인 초록색 마을버스를 발견했다. 아직 시간도 이른 데다 크게 피곤하지도 않으니 돈을 좀 아껴보기로 했다.

 


“기사님, 6호선 지하철역 쪽으로도 가나요?”

 

“네~~네~~ 상수역~~ 갑니다~~~~”

 


경쾌한 목소리의 기사님은 형광 언더아머 바지에 쫄티 그리고 토시를 착용한 채 웹툰을 보고 있었다. 버스 진동에 맞춰 다리를 달달 떨며 핸들에 안기듯 기대 있는 기사님의 머리는 바가지 컷이었다. 반쯤 올라타다가 멈칫하고 버스를 한 번, 기사님을 한 번 쳐다봤다. 바가지와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많아 봐야 이십 대 후반 정도 돼 보였다. 가정이 맞는다면 그는 나보다 동생일 터. 일부러 운전석이 보이는 대각선 뒤쪽 좌석에 앉아서 남자의 얼굴을 자세 쳐다봤다. 버스 기사님이 나보다 어리다는 게 흥미로웠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이제 나도 그럴 나이가 된 건지 꼰대의 시선으로 바가지 기사님에 대해서 생각했다.

 

‘혹시 불량 청소년이 버스 훔쳐 탄 거 아녀?’ 골목을 부앙부앙 질주하고 좌회전 신호에 드리프트를 하던 그가 앞에 끼어든 모닝에 대차게 클랙슨을 울리고 찰진 욕을 박았다. 너무나 능숙한 그 모습에 헷갈렸다. 얼굴이나 행색은 20대 청년인데 하는 행동은 꽤 잔뼈가 굵은 기사님 같기도 하고.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론 모르는 모양이다. 

 


화끈한 운전한 기사님 덕에 금세 지하철역이 가까워져 왔다. 내리려고 좌석에서 엉덩이를 떼려다가 달리는 버스 진동에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아이가 갑자기 멈춘 버스 바닥에 자빠지려는 걸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잡아 줬다. 아이는 부끄러운지 얼른 고개를 꾸벅하고는 어서 문이 열리기만을 고대하는 얼굴로 꼿꼿이 서 있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스스로 해 보겠다며 고사리손으로 힘겹게 돈통에 동전을 집어넣는 나를 아빠 미소로 바라보던 버스 기사님이 생각났다. 행여 내가 넘어질까 봐 다 넣을 때까지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주던 기사님의 흰 장갑도 떠올랐다. 그땐 잘 몰랐는데 기사님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아이의 등판보다 큰 터닝메카드 책가방이 참 귀여웠다. 


버스 기사님은 택시 기사, 경비 아저씨와 더불어 내 마음속 아저씨 3대 대명사로 꼽힌다. 티셔츠 깃을 빳빳이 세우고 무스에 젤까지 발라 넘긴 반듯한 가르마를 하고, 꽃을 든 남자 스킨 로션 향기를 풍길 것만 같은 아저씨 말이다. 그 아저씨 그룹에서 드디어 나보다 어린 친구가 나와 버렸다. 나도 회사원 아저씨가 된 마당에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기분이 좀 묘한 상황이긴 했다. 젊은 기사님을 내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형광 언더아머 기사님보다 내가 더 아저씨가 됐으니까. The 아저씨. 


버스에 앉아 있으면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 같은데 주변은 계속 변해간다. 창밖을 보던 눈이 핸드폰을 향하게 되고 멍하니 졸기도 하다 보면 내가 이동 중이란 사실을 잊을 때도 있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세월의 속도감을 잊었다. 흰 장갑 기 사님의 후배가 핸들을 물려받는 새 요금통에 동전을 집어넣던 나도 이젠 버스카드기에 교통카드를 찍는 직장인이 됐다. 나머지 카드로는 매달 아파트 관리비가 결제되고 핸드폰 요금과 무선인터넷 요금, 매월의 식비와 각종 생활비가 나가고 있다. 거기까지가 ‘삼촌’으로 불리는 영역인 것 같다. 나아가 은행 잔고에서 아파트 대출금이 이자와 함께 납부되고 결혼이나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문득문득 고민해보게 될 때 비로소 ‘아저씨’라고 불려도 무던해지는 시기가 오는 듯하다. 

 

시대가 바뀌어 흰 장갑이 아닌 언더아머 손목 밴드를 찬 손이 버스 핸들을 돌리고 있다. 이제는 내가 넘어지려는 어린아이를 잡아 주고 있다. 상수행 마을버스에서 슬쩍 주위를 돌아보며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고는 다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른 경기도 사는 수택동 아저씨. 앞으론 나보다 어린 기사님들을 더 자주 보게 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