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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트투어 김사자] 행복.7 고향의 봄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과의 두번째 이야기)

2018년 3월 24일 토요일. 고향엘 다녀온 날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취미의 고향이라고 할까?

 

'마음 속에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이란 고향의 뜻처럼 나의 취미에도 그런 곳이 있다. 마음의 고향이라는 표현도 있으니 취미의 고향이라는 말을 써도 괜찮겠지.

듣는 모두를 놀라게 하는 내 취미 중 하나는 클래식 음악 듣기다. 친구들이나 회사 동기들처럼 가까운 이들도 다소 미심쩍어하는 나의 이 취미. 다혈질에다 마이웨이가 강해 기행(奇行)도 곧잘 저지르는, 헛소리류의 농담 던지기를 일삼는 내 모습에 익숙해서 그랬을까? 차라리 이종격투기를 한다면 "어~ 그럴듯해~" 했을 그들이 모두 놀라는 내 취미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클래식 음악 듣기다.

 

 

대학 2학년 쯤이었을까? 학교 후문에 인접한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웹툰도 다 본 뒤라 지루함을 못 이겨 주변을 힐끗 둘러보는데 광고판에 끼워진 빛 바랜 음악회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4개월 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클래식 음악 공연을 했었네. 어디선가 들어본 낯선 이름도 눈에 들어왔다. 듣고 있던 유키구라모토의 <Lake Louise> 를 멈추고 검색창을 열었다. 어디보자.. 리처드.. 영재 오닐. 없는데? 아 용재 오닐이구나. Richard Yongjae O'neill. 맨 위에 올라와있던 그의 연주곡을 눌렀다.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가슴의 저릿함.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진 모르겠다. 언젠가 버스가 왔을거고 나는 거기에 올라탔을거다. 타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버스기사 아저씨는 아마 조금은 놀랐을거다. 반 촛점 잃은 눈동자의 청년이 어딘가에 홀린 듯 올라탔으니. 비도 추척추적 오고 추운 날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 곡은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 in A minor D.821)였고 나의 클래식 러빙도 시작되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소극적이고 보수적으로 좋아하는 곡만 들었었다. 주변에 음대생이 없었기에, 또 누가 같은 취미를 가진 누군가를 발견하지 못해 혼자만의 세상을 펼쳐가며 들었는데 그것조차 퍽 재미가 있었다. 몇 년 동안 뽀얀 먼지가 쌓인 피아노 커버를 들쳐내는 계기도 되었다.

 

1년 전 리처드 용재 오닐을 마주한 날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올해 재봉(再逢)한 그는 정겨운 고향이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도 들려줄 예정이란다. 수번을 생각하고 십수번을 떠올려도 설레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고향의 정취겠지.

 

 

우연인지 필연인지 용재 오닐과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처음 만났던 그 날도, 다시 만난 날도 봄(春)이었다.

 

 

 

 

이번 리사이틀의 제목은 <당신을 기다리며> 였다. 딱 내가 하고 싶은 말.

특이하게도 모든 프로그램이 현(絃)과 현의 만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이올린에는 한 번쯤 들어보고 싶었던 신지아씨가, 첼로에는 역시 1년 만에 보는 문태국씨, 마지막으로 비올라에는 용재 오닐과 더불어 또다른 비올리스트인 이수민씨가 함께 자리했다. 거의 전 곡이 현악 듀오의 향연이었는데, 비유하자면 첼로 한 스푼, 바이올린 두 스푼에 비올라 세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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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첼로와 비올라를 위한 듀오 '아이글래스'(Duo in E flat major for Viola and Cello Wo0.32) 로 경쾌하게 시작했다.

비올라에 리처드 용재 오닐, 첼로엔 문태국. 용재 오닐이 이끄는 클래식 그룹 '앙상블 디토' 멤버인 둘의 합주 호흡은 정말 찰떡이었다.

이 곡은 악보를 처음 보고 바로 연주할 수 있도록 작곡된 초견(初見)곡이라는데, 베토벤이 친구와 함께 연주키 위해 작곡한 곡이다. 친구와 함께하려 곡을 쓰다니! #우정스타그램 #친스타그램 #친구

 

2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1악장은 빠른 연주가, 2악장은 약간 느려진 춤곡의 분위기를 풍긴다.

평소 생각해오던 베토벤의 곡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비창 소나타> 처럼 좀 더 은근한 감정이 드러낼 듯 갈무리된 분위기거나 <운명> , <합창> 교향곡과 같이 격정적이고 장엄한 열정이 떠오르곤 했는데.. 왠지 다른 느낌의 이 곡의 작곡 연도를 보니 1796년. 그가 26살 때다. 이십대 청춘 시절 쓴 곡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게다가 앞서 말한대로 우정 연주를 위해 쓴 초견곡이니 충분히 다를 수도 있다고 본다.

비올라 소리는 살랑대며 불어오는 봄철의 미풍(微風)이요, 첼로 울림은 그에 맞춰 흔들리는 벚꽃잎이다. 달빛 그득한 봄 밤에 듣기에 정말로 제격이기에 추천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L1wDSjg_UU

▲ 베토벤의 첼로와 비올라를 위한 듀오 1악장. 용재 오닐x문태국 버전은 유투브에 없다. 음원 사이트에서 검색하거나 CD를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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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듀오, K.424, Op.28(Duo for Violin and Viola in B flat major K.424)

어릴 적 읽은 위인전과 영화 <아마데우스> 를 통해 심각한 악동이자 범접할 수 없는 천재로 기억된 모차르트. 그가 미하일 하이든의 스타일을 흉내내어 작곡한 이 3개 악장의 곡에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주거니 받거니 귓가를 간질인다.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가 함께 한 자리다.

 

 

사실 모차르트 곡은 이해가 어렵다. 서른 살 정도에 요절을 했다지만 그 사실 마저 상쇄할 정도로 너무 천재적인 음악가였기에 그리 비운의 사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도 하고.. 모차르트 곡을 들을 떄 마다 '와, 역시 모차르트다~ 잘 만들었다!' 싶긴한데 아직 식견이 높질 않아선지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ㅋㅋ 제대로 들어보겠다고 출퇴근길 차 안에서도 CD 재생 버튼을 누르고 심지어 누워서도 들어봤는데 꿀잠 잤다. 땡큐. 언젠가 제대로 들리겠지.

 

https://www.youtube.com/watch?v=CDnYIAqOf4Y

▲ 모차르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듀오 2악장을 들어보자. 해석이 잘되는 사람 있음 댓글을 달아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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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를 연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6번(Brandenburg Concerto No.6 in B flat major, BWV 1051)에서는 신기한 소리가 들렸다. 용재 오닐 말고도 또 다른 비올라 소리가 들렸다. 앞서 이 곡은 협주곡이라고 했다. 협주곡, 내가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처럼 보통 주가 되는 독주 악기 하나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형태다. 그런데 이 곡은 협주곡이라면서 같은 악기가 여럿이다. 현악 6중주도 아닐거야, 건반 악기도 보이니깐. 바흐가 살던 시절에는 협주곡에도 같은 악기가 여러개 등장했고 또 오케스트라의 규모도 현악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단다.

 

재미난 것도 포착했다. 파이프 오르간 이후로 독특한 소리를 들려준 악기랄까? 외형은 그랜드피아노 흡사한데 원색의 빨간색에다가 아기자기한 맛을 주는 쳄발로(Cembalo).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릴 적 읽었던 모차르트 위인전에 나온 하프시코드(Harpsichord)가 아닐까 싶었는데 쳄발로나 하프시코드나 같은 악기였다ㅎㅎ 하프시코드는 영어, 쳄발로는 이태리어로. 쳄발로의 잔망스러우면서도 발랄한 음색이 맘에 들어 제법 긴 길이의 쳄발로 카덴차(협주곡 중 한 악기의 독주)가 있다는 5번 1악장을 들어봤는데 통통 튀는게 키보드 건반 연주소리 같기도 한 것이 내 스트레스도 통통 날려버린다. 

 

 

바흐가 활동하던 18세기의 바로크 음악 작곡가들은 협주곡으로 진검승부를 겨뤘다. 그 중에서 바흐가 단연 으뜸이었는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음악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그의 협주곡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한다.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공에게 헌정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제목의 이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총 6번까지 있다. 여섯개의 곡들은 정말로 변화무쌍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구성에다가 또 전 곡 연주를 위해선 당시 사용되던 거의 모든 악기들이 필요하기까지 했다하니 가히 바흐 협주곡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_1MVPRxfwM

▲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 1악장을 들어보자.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연주도 정말 훌륭하다. 지네 나라 곡이라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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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장식한 슈베르트(Franz Shubert)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 in A minor D.821)

이 곡을 듣기 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악장 25초 쯤이었을까? 드디어 흘러나온 비올라 첫 음에 울컥. 갑자기 눈 앞이 심히 흐려지는데 그 와중에도 이 모든 걸 오롯이 그리고 충만하게 담아가고 싶었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이 곡, 실제로 들으면 정말 울 것 같아.'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보기보다 굉장히 센서티-브 하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아르페지오네라는 악기를 위한 소나타 곡이다. 아르페지오네는 19세기 이탈리아 빈의 기타 제조 명장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기타도 아닌 것이 첼로도 아닌 악기다. 다들 뒷 전이엇던 이 악기를 슈베르트는 눈 여겨 봤고 이 명곡을 만들었다.

가곡의 왕이라는 슈베르트 곡 특유의 느낌을 좋아하는데, <미완성교향곡> 과 함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가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나도 심심할 때마다 즐기곤 한다. 특히 오늘의 이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기분이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스트레스 받을 때나, 고민이 필요할 때 언제든 듣는 마법의 주문이다.

 

 

슈베르트 곡을 듣고 있자면 작게, 아주 작게 노랫말이 읊조려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분명히 이건 가사가 없는 건데, 악기들의 연주가 노래하듯 들려오니 신기할 따름이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이후 위인전을 통해 그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히스토리를 알게 됐다. 그리하여 연가곡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슈베르트는 초등학생이었던 당시 나에게도 음유시인의 인상을 줬었다. 슈형의 곡에선 속삭이듯 노랫소리가 들린다.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나 1악장이겠지만 나머지 악장도 시간이 흘러 다시 들으니 또 다른 맛이 있다. 느리게 전개되는 2악장은 힘들고 지치지만 어쨌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그려진다. 3악장에선 낭만적인 희망이 슬슬 배어나다가 헝가리 춤곡 마냥 아주 그냥 대놓고 흥까지 돋우니 고개가 좌우로 흔들흔들. 에피타이저부터 홍차까지 완벽한 코스 요리를 먹은 듯한 포만감이 든다. 이 느낌에 클래식을 사랑하잖아! 근데 걱정이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가 난다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S0YLqYI6x1A

듣는다. 감격한다. 내 귀도 쓸모가 있구나 생각한다.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타나 연주 by 리처드 용재 오닐.. 오케가 아쉽다.

 

 

2013년의 어느 이른 봄 날. 우산을 받쳐들고 마을 버스나 기다리고 있던 내가 누군가를 이다지도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이토록 무언가를 듣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될진 몰랐다. 나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 생길진 더더욱 몰랐다. 오늘을 너무나도 바라고 기다렸었다.

 

당신이 연주한 이 곡이 내겐 시작이 되었다고, 낯 뜨거운 인사를 전하며 고향마을 동네 형의 손을 마주 잡았다. 푸근하면서도 따뜻함이 전해지던 순간 나는 고향의 봄을 느끼고 있었다.

그 흥취에 코 끝은 알싸하고 정신은 아득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