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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트투어 김사자] 행복.5 차이코프스키로부터 (with 모스크바 필하모닉)

그는 어릴 적 우리와 함께 하던 친구였다.

 

유치원에서 그림책으로 보곤 하던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그리고 초등학생이 되어 읽은 로미오와 줄리엣 까지.

발레로도 유명한 이 동화와 소설엔 러시아 출신 음악가의 숨결이 맞닿아 있다.

 

이야기에 음악을 결합시켜 발레곡으로 재 창조시킨 러시아의 전설 아니고 레전드 작곡차이코프스키(Peter.I.Tchaikovsky)

 

그의 곡들은 특유의 웅장함을 뼈대로 삼아 은근한 박력과 섬세함으로 살을 이어 붙인 듯 하다.

어린 시절 어린이 발레곡에서 그 아기자기한 울림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심 속 세계로 빠져들었다면, 성인이 된 지금은 보다 절제되면서도 장중하게 깊어져 가는 연주에 가슴 떨리는 벅참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소개할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곡들이다.

 

온천은 일본에서, 맥주는 독일에서, 그리고 불곰국 작곡가의 곡은 불곰국 악단에게서.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은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의 연주로 들어야 제 맛이다.

 

 

▲ 얼굴 표정까지 다 보이는 자리로 겟! 그러나 러샤 형누나들은 표정 자체가 별로 없던 듯했으니..

 

 

태어나서 러시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건 처음 봤다 ㅎㅎ

미국이나 유럽 쪽 교향악단원들을 보면 표정의 변화가 제법 많은 편인데, 이 들 다수의 얼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았다. 추운 나라에서 와서 그런가? 살짝 어색하긴 했지만 어색 근엄 딱딱함이야말로 러시아의 멋이렸다!

 

 

 

 

이번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내게 특별했다.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공연을 눈 앞에서 본 건 처음이거니와, 그 곳 소속 지휘자의 솜씨를 직접 볼 수 있었던 자리였기에.

 

올해 초 오스트리아의 빈 필하모닉(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신년음악회를 영화관에서 (ㅠㅠ 직접 보고 싶어요) 감상하며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 이 너무도 재미나게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것을 보며 참 멋지다 싶더라.

악기를 연주하는 것 만큼 지휘라는 것도 빠져들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모스크바 필하모닉 지휘자인 유리 시모노프(Yuri Simonov)의 손 움직임에 따라 연주의 흐름이 달라지고 음악이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마법을 보는 듯 했다.

그의 지휘에는 노련함과 더불어 힘이 배어났는데 젊잖은 노신사에게서 그런 에너지가 넘쳐흐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휘날리는 지휘봉을 마주하며 내게도 마법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 이제는 익숙한 대구콘서트하우스. 2017년 후반쯤부터 밀고 있는 월드오케스트라시리즈의 구성을 보면 다 예매하고 싶다..

 

처음으로 공연 참석 티 팍팍 내는 이런 사진 찍어보고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은 총 3곡이다.

당초 예정되었던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Romeo and Juliet Fantasia Overture in B Minor)'

그리고 뒤에서 이야기 할 협주곡 1곡과 교향곡 1곡. 그런데 공연장에 들어가는 찰나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이 차이코프스키의 다른 오페라곡으로 변경되었다는 속보 아닌 속보가 안내되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듣게 된 이 곡은 과연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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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Eugene Onegin) 중 폴로네이즈(Polonaise)'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알렉산드르 푸쉬킨(Pushkin) 의 산문시 '예프게니 오네긴' 에 감명 받은 차이코프스키가 쓴 오페라에 수록된 곡이다.

 

3막 1장을 여는 곡으로 '폴로네이즈: 폴란드의 민속 춤곡' 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작부터 빠르고 경쾌한 리듬감이 이끈다.

이번 공연의 첫 곡이었는데, 관객들의 귀를 열어주기에 이만한 선곡이 또 없을 것 같았다.

 

차이코프스키 곡 특유의 박력과 감각적인 빠르기 조절로 나타내는 감정묘사는 연주되는 음악 자체에 스토리가 담겼다고 오해될 정도로 세심하다. 

단지 이 곡만으로도 느낌이 너무 좋아 한 번쯤 보고 싶은 오페라다.

 

https://youtu.be/hIV4PVl0fvg (출처 Youtube)

△ 금난새 선생님 지휘의 차이코프스키 오페라 '예프기니 오네긴 中 폴로네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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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도입부의 여린 하모니를 들을 때 마다 절로 눈 감기곤 한다.

꽉 찬 음률 사이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바이올린 솔로 연주에 몸을 맡겨보자니 귀가 간질간질 참 즐겁다.

 

오늘의 자리를 빛낸 솔리스트는 바이올리니스트 '세르게이 크릴로프 (Sergei Krylov)'

풀어헤친 머리와 헐렁하지만 반듯하게 다린 듯한 셔츠를 입은 그는 영화 <스쿨오브락 (The School of Rock)> 으로 유명한 '잭블랙 (Jack Black)' 을 바로 연상케 했다.

적절한 강 약 조절과 테크닉이 뒷받침 되어야만 느낌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역할.

혼자 선 것이 아닌, 오케스트라와 한 몸이 되어야만 하는 무대였기에 관객석의 나까지도 설레고 긴장됬다.

화려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활을 당기며 그는 완벽하게 무대와 하나가 되었고 우리를 홀렸다.

활이 현에 닿는 순간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강렬함과 나긋함이 번갈아가며 느껴졌다. 

함께 한 30분이 3시간이 아닌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1악장의 중반이 시작될 땐 전개 부분의 주제가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의 파괴력을 과시하며 다시금 연주되는데 그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압도적인 웅장함이 느껴질지어다.

 

특유의 고풍스러움으로 국내 모 가전 브랜드에서 내놓은 초 프리미엄 가전 라인의 CF 주제곡으로 선택된 바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소개한 1악장에 뒤이어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변을 장엄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꽉 채우고 싶은 분들은 '어머! 이건 꼭 들어야 해!' 수준의 작품이다.

 

https://youtu.be/CTE08SS8fNk (출처 Youtube)

이자크 펄만(Itzkak Perlman),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협연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영상인데도 넋 놓고 본 레전드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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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제 6번 B단조, Op.74, "비창" (Symphony No.6 in B Minor, Op.74, "Pathetique")

 

이 곡은 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선언한 바 있는, "생애 가장 진지한 작품" 이다.

차이코프스키 생 전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이 '비창 교향곡' 은 초연 후 그의 동생과 협의하여 붙인 부제라는데, '비창(悲愴)' 이라는 단어가 당시 그가 느끼고 있던 슬픔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적절히 담아내어 스스로도 만족했다고 한다.

 

1악장에서 Adagio - Allegro Non Troppo (너무 빠르진 않은 정도의 빠르기)라 소개되는 분위기는 마치 감동적인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시작부터 보는 기분이다. 빠른듯 느린듯 울적하게도 합주되는 주제는 이 곡 전체를 꿰뚫을 정도로 긴 여운이 남는다.

 

2악장은 Allegro Con Grazia 라는 소개 그대로 '빠르고' 또 '다정한' 느낌을 전해준다.
나름의 경쾌한 애수가 느껴지는데 겉은 밝은 척하지만 속은 슬픔인가 걱정인가에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이의 모습 같다랄까.
중반쯤 접어들자니 다시 울려퍼지는 애수의 화음.

 

3악장이 시작되면 언제 슬펐냐는 듯 경쾌하고 빠름이 전해진다.
악장의 분위기는 Allegro Molto ViVace (아주 빠르고 생기있게) 그 자체다.
후반부로 갈수록 트럼펫과 금관악기의 연주에 힘이 실리면서 경쾌함을 바탕으로 웅장함이 극에 달한다.
팀파니와 심벌즈 소리가 악장의 최후반을 리드할 때면 머리를 살랑 흔들어대며 곡에 취해 있을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거다.

 

슬프다 못해 비통함과 애통함이 느껴지는 4악장 (Finale - Adagio Lamentoso)
좀 전까진 흥이 잔뜩 올라있었건만 마지막 악장으로 넘어 오니 뭔가 눈치도 보이고 참 그렇다.
그런 생각도 잠시, 악장이 전개될수록 느리면서 깊은 울림의 장중함에 젖어있다.

 

이 '비창' 교향곡이야말로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차이코프스키 작품세계의 정수(精髓)가 아닐까 감히 생각된다.

 

https://youtu.be/yDqCIcsUtPI (출처 Youtube)

정명훈 선생님이 지휘, 서울시향 연주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 6번 ''비창'

 

 

▲ 모든 공연이 끝나고 박수 갈채를 받으며 인사하고 있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

 

 

차이코프스키 '비창' 교향곡은 최근의 나에게 위로로 다가온 곡이다.

회사생활을 포함한 일상에서 힘겨움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 곡을 꼬박 이틀 동안 감상하며 꽤나 많은 힘을 얻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비롯하여 든든한 내 편으로도 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도 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제일 불행한 것 같아'

'결국엔 세상에서 나 혼자야'

 

사춘기가 지나고 찾아온 오춘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현실적이고 눈 앞에 닥친 걱정거리에서 파생되는 외로움과 불안감.

거기에다 그간 애써 버텨 오던 용기까지 잃어 지쳐올 때면 그때부터 참 힘겨운 나날들이 시작된다.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의 일들만 발생하는 듯 하고 유독 내가 하는 일만 안되는 것 같으니 밥이고 잠이고 모든 게 다 싫어진다.

 

차이코프스키의 깊은 애환이 가득 배인 이 곡을 듣다 보면 희한하게도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비통함에 가득 싸인 이 4악장 짜리 작품을 듣고 있자면 역설적으로 나의 그 힘듬을 딛고 올라 설 수 있을 것 같다.

작곡가의 슬픔에 공감하는 과정에서 힘들어하던 개개인은 '함께' 가 되고 어느새 부정적인 감정을 '같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회복 탄력성(Resilience) 이 샘솟는 듯 하다.

 

어쩌면 곡의 제목이자 그 안에 담긴 '비창'은 단순한 슬픔 뿐만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는 가운데 느낄 수 있는 기쁨을 포함한 삶에 대한 '애환(哀歡)'이 아니었을까?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모두가 그럴거다.

다들 티를 낼 타이밍을 놓쳤거나 아니면 생각도 못하고 있거나 혹은 꾹꾹 눌러 참고만 있을거다.

 

한껏 슬픔을 펼쳐내던 비창 교향곡의 마무리는 제법 담담하다.

곡이 끝나매 우리들이 느끼던 슬픔도 있었던 듯 없었던 듯 사라져있길 바란 걸까.

 

차이코프스키.
어릴 때 놀라움으로 두 눈을 크게 키우던 그 작품의 웅장함은 이제는 절로 눈 감게 만드는 떨림이 되었다.

처음 들었을 적 소름 돋던 감성은 어느덧 가슴 깊숙히 와 닿아 울리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에브게니 오네긴' 의 원작자인 푸쉬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로 유명하다.

차이코프스키 작품과 더불어 소개하고픈 이 시의 주요 골자는 이렇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고통의 날들을 견디어 내면

기쁨의 날이 찾아오리니

 

마음은 다가올 날들에 살고

슬픔은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순식간에 모두 날아가 버리고

기쁨은 내일 찾아올 것이니

 

 - 알렉산더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中

 

 

단순히 희망만 불어 넣어주기 보다는 은근히 논리적으로 힘내라고 하는 시랄까.

우리에겐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있음을 노래하는 이 작품은 특히나 지친 직딩들의 등을 토닥여준다.

상사에게 혼나고 거래처에서 또 치이고 다시 통장잔고에 당하는 고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손 내밀어주는 뭔가가 있다는 건, 힘든 와중에도 피식 웃음 지을 수 있게 하는 고마운 응원이다.

 

차이코프스키의 곡에서 푸쉬킨의 시까지 러시아 예술엔 무심한 듯 챙겨주는 새침한 다정함이 있다.

 

내 앞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그 굳은 표정 속에도 차이코프스키가 내 마음을 흔들었던 그런 섬세함과 따뜻함이 있을거다.

그들은 차이코프스키의 후손들이니까.

그리고 그게 바로 러시아 음악의 매력이니까.

 

예술을 통해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것,

차이코프스키로부터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것.

 

과거로부터 온 따뜻한 위안에 지친 마음을 녹일 수 있다는 건 이 시대 우리들의 특권이 아닐까 싶다.

 

끝.